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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수는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다

입력 2023.02.13 03:00

수정 2023.02.1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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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얽히다’라는 동사를 종합격투기 경기장에서 배운다. 케이지는 선수들의 팔다리, 손목과 발목, 팔꿈치와 무릎 관절이 뒤얽히는 장소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선망 혹은 앙금, 이해관계, 훈련의 역사가 뒤얽힌다. 시계방향으로 자라는 등나무와 반시계방향으로 자라는 칡나무처럼 두 선수는 시합의 형식 안에서만큼은 상생할 수 없다.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나란히 놓으면 ‘갈등’이 된다. 충돌과 뒤얽힘이 격투기의 본질일 것이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그것은 우발적인 싸움이 아니다. 오랜 시간 상대와 자기 자신을 연구하며 정진해온 자들의 스포츠다. 격투기라는 기예, 그중에서도 서로 다른 무술을 섞어가며 겨룰 수 있게끔 룰을 고안한 종합격투기(MMA)는 풍부한 텍스트를 지녔다. 선수들이 비언어로 움직이는데도 경기를 다 본 내 마음엔 수많은 문장이 남게 된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 언제나 패자의 얼굴이다. 시합이 끝나면 모든 선수들은 진실을 맞닥뜨린다. 이겼다는 혹은 졌다는 진실. 승자는 열광하는 관객과 마주하지만 패자는 오직 자신만을 마주한다. 어떤 야유나 격려의 음성도 선수 내면의 자책만큼 커다랄 수 없어서다. 커다란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라는 진실과 독대하는 이들을 본다.

최근 한국 격투기 판에는 멋진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신생 단체 ‘블랙컴뱃’이 만드는 흐름이다. 블랙컴뱃은 기존 격투기 단체들의 아쉬운 관행들을 십분 보완하며 넉넉한 파이트머니와 충분한 시합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은 이야기를 ‘기깔나게’ 만드는 방식으로 판을 키운다. 블랙컴뱃 제작진이 캐릭터와 플롯의 활용법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의미다.

선수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캐릭터로서 흥미롭게 기능하도록 연출한다. 취향에 따라 어떤 선수를 덜 선호할 수 있겠으나 누구도 함부로 폄하할 수는 없게끔 서사를 짠다. 격투기 현장 특유의 다소 꼴사나운 마이크웍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수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된다. 선수들이 블랙컴뱃 케이지 안에 입장할 때 나는 대체로 어느 한 쪽만을 응원하지 못한다. 문자 그대로 피땀 흘려가며 이 자리에 선 이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알게 됐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쉽게 감정이입하는 이 마음은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걸. 다만 이 마음은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 사람. 모든 걸 걸고 이야기의 중심으로 향하는 사람.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모든 걸 잃을 사람이 누군지만 알 뿐이라는 걸.”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다는 건 퇴로를 마련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올겨울 블랙컴뱃에서는 국가대표를 뽑기 위한 선발전이 있었다. 다가올 한·일전에 내보낼 대표 선수들을 뽑는 경기였다. 그중 중량급 전영준 선수와 최준서 선수의 시합이 영화처럼 남아 있다. 둘은 1, 2 라운드 내내 비등비등하게 겨뤘다. 어떤 싸움은 처절하게 맞붙어도 확실한 우열 없이 끝나기도 한다. 심판의 뜻에 맡긴 결과 미세한 우위로 전영준이 판정승을 거뒀다.

그런데 이때 전영준은 이의를 제기한다. “제가 원하는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납득하지 못하겠어요. 연장을 가더라도 조금 더 저답게 한 번 더 해보고 싶습니다.” 패자가 아닌 승자가 다시 싸우자고 제안했으므로 경기장은 수런거린다. 전영준은 쌍코피를 흘리며 다시 한번 못 박는다. 다시 싸워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이겠다고. 지금 이 승리는 애매하다고. 그렇게 자신이 건너온 다리를 활활 불태운다.

결국 두 선수는 연장전을 치른다. 시작하기 전 거세게 서로를 껴안는다. 애매하지 않은 승패를 향해 다시 싸워주는 상대에 대한 감사함으로 벅차오르기 때문이다. 연장전 결과 만장일치로 최준서가 승리하며 승패가 뒤바뀐다. 하지만 전영준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후회도 찾을 수 없다. 그게 그가 격투기를 존경하는 방식일 것이다.

멋지게 패배한 전영준에게 주변 선수들이 환호한다. “사나이네.” “남자다, 남자.” 이때 나는 떠올린다. 전영준 선수와 비슷한 용기를 지녔을 또 다른 여자들의 얼굴을. 그 용기에 관해서는 사나이다움과 연관 짓지 않고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대부분의 격투기 단체처럼 블랙컴뱃도 전형적인 남성 호모 소셜의 모습이었다. 동성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동성끼리의 유대 관계, 그중에서도 주로 남자 선수들로만 가득찬 격투 판의 호모 소셜에서는 여성성이 연약하고 우스운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런 와중에 블랙컴뱃이 여성부 경기를 신설했다. 새롭게 떠오르는 걸출한 여자 파이터들을 본다. 이들이 어떻게 다르게 싸우는지, 혹은 하나도 다르지 않게 싸우는지 관찰하며 다시 배운다. 결코 고정될 수 없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그러므로 다가올 문장들은 여성부의 찬란한 갈등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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