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여론조사기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2022년 12월26~27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윤석열의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는 41.5%, 부정평가는 54.9%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건 긍정과 부정의 이유였다. 긍정평가 이유로는 ‘결단력이 있어서’가 40.3%로 가장 많았고, 부정평가 이유로는 ‘독단적이고 일방적이어서’가 33.9%로 가장 많았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2022년 12월26~28일에 실시한 전국지표조사 결과도 비슷했다. 윤석열이 국정운영을 잘한다고 한 응답자의 비율은 34%, 부정평가는 56%였는데, 긍정평가 이유로는 ‘결단력이 있어서’가 33%로 가장 많았고, 부정평가 이유로는 ‘독단적이고 일방적이어서’가 34%로 가장 많았다.
똑같은 언행이라도 지지자들은 ‘결단’으로 보는 걸 비판자들은 ‘독단’으로 본다는 것이니, ‘결단’과 ‘독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걸까? 결단과 독단의 차이는 무엇일까? 없다. 사실상 같은 말이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칭의 변화에 따라 같은 내용이라도 표현이 다를 수 있다며, 그 사례로 “나의 의지는 굳다. 너는 고집이 세다. 그는 어리석을 정도로 완고하다”는 걸 들었다.
런던의 한 잡지사는 이와 같이 주어에 따라 표현이 다르게 변하는 유형들을 모집하는 대회를 열었는데, 당선작으로 뽑힌 것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나는 정의에 따라 분노한다. 너는 화를 낸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날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너는 변심했다. 그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다.”
시인 권혁웅은 “나는 용감하고 순수하며 세심하고 열정적이고 절제하며 불의를 참지 못한다. 그러나 이 덕목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면, 그는 무모하고 단순하며 소심하고 욕정적이고 억압돼 있으며 분노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된다”면서 “중요한 것은 덕목이 아니라 누가 주인인가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덕목을 고르는 일이 필요한 때다”라고 했다.
옳은 말씀이라고 공감하는 순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상대방의 입장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건 상대방에게 큰 타격을 주려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덕목’을 고르는 데에 혈안이 된 정치판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적 언행에 대해 관점을 조금만 바꾸거나 이동시켜 보면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일일 때에도 부정 일변도의 독설로 비난하는 사례들이 너무 많다.
그게 정치의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는가. 그런데 정치인이건 유권자건 똑같이 저지르는 한 가지 오류가 있다. 그건 자신의 정치적 평가는 정치현상의 스타일(겉)이 아닌 알맹이(속)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는 착각이다. 이는 아주 오래된 착각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스타일이 문제라면 유행을 따르라. 그러나 원칙의 문제라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말라”고 했다. 얼른 듣기엔 멋져 보이는 말이지만, 스타일과 원칙은 그렇게 양자택일을 해도 좋을 만큼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나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정치의 핵심을 꿰뚫어본 선구자였다는 건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정치가 ‘본질(what is)’의 영역이 아니라 ‘외양(what appears)’의 영역에 속하는 걸로 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나타나는 바 당신의 외양(what you appear to be)을 보지만 당신이 정말로 무엇인지 당신의 본질(what you are)을 인지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본질과 외양 구분은 모호
한나 아렌트도 “그 어떤 분야보다도 정치에서는 본질과 외양을 구별할 길이 없다”고 했다. 미디어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정치에서는 인식이 현실이다”라는 건 이젠 상식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늘 진실을 외치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갈파했듯이, “대단히 중요한 사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진실성이 아니라 스타일”이다. 설득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감성의 지배 영역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타일을 얕잡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대통령 윤석열도 그런 정치인 중 한 명이다. 본질이나 콘텐츠가 워낙 뛰어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 스타일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니 이만저만 딱한 일이 아니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행정안전부 장관 이상민의 책임 문제와 관련된 윤석열의 강한 고집이 그 좋은 예다.
윤석열은 지난해 11월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일선 경찰을 강하게 질책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 발언에 대해 언론인 성한용은 “정치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발언”이자 “정치인이 아니라 법률가의 좁은 식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발언”이었다고 비판했다.
옳은 말씀이다. 아무래도 윤석열은 역대 거의 모든 정권이 지켜온 ‘정치적 책임’을 유행과 같은 ‘스타일’의 문제로 낮춰보면서 “원칙의 문제라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말라”는 제퍼슨의 조언을 따른 것 같다. 그는 원칙 사수를 위해 그 어떤 정치적 불리함도 감수하겠다는 비장미까지 풍겨가면서 갈등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으니 혀를 끌끌 차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책임이 법적 책임 못지않게 중요한 대통령직 수행과 자신의 그런 원칙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걸 전혀 이해할 수 없단 말인가?
대통령 논란 대부분은 스타일 문제
이상한 일이다. 윤석열은 습관으로 고착된 자신의 스타일은 강하게 고수하면서 사회적 관습이 된 집단적 스타일엔 별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마이웨이’로 치달으면서 그걸 깨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윤석열은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실질’을 위해 스타일을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서 거칠게 유린했다. 그마저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매우 오만하고 고압적인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석열은 지지율이 폭락했을 때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건 허세다. 지지율이 낮으면 여기저기서 도전이 거세게 일어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엄중하고도 엄중하게 경계해야 할 일은 경멸당하거나 얕잡아보이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이 경멸당하거나 얕잡아보이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안전장치가 바로 지지율이다. 지지율이 높은 대통령을 상대로 ‘대통령 퇴진운동’이나 ‘대통령 탄핵운동’이 일어난 적은 없다는 걸 상기해보라.
이 지지율 게임에서 중요한 건 ‘본질’이 아니다. 국민에게 보이는 ‘외양’이 더 중요하다. 정치인들에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은 필요악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은 당대표 선거에 개입하더라도 언론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한다. 임기가 끝난 지도자의 ‘정치비화(政治秘話)’가 양산되는 이유는 그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정치의 본령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은 은밀하게 비밀로 해야 할 것마저 다 드러내고야 마는 스타일이다. ‘7·26 자해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2022년 7월26일 윤석열과 권성동이 화기애애하게 주고받던 텔레그램 메시지(“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가 취재카메라에 포착돼 만천하에 공개된 사건이다. 그거야 권성동의 부주의가 문제일 뿐, 윤석열은 잘못한 게 없다고? 그렇지 않다. 그런 메시지는 아예 생산하지 않거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게 원칙이다.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윤석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주의하거나 둔감한 스타일을 갖고 있는 정치인이다. 그 대신 ‘뚝심’이라는 장점이 있다곤 하지만, 엉뚱한 일에 뚝심을 보이면 그건 더 골치 아프다. 따라서 “그까짓 스타일”이라고 일축할 일이 아니다. 윤석열의 지지율에 큰 타격을 입힌 사건들의 대부분은 스타일의 문제였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라는 걸 감안하자면, 알맹이의 문제라는 것도 상당 부분은 스타일의 문제다. 사정이 그와 같으니,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을 원용하자면, 어찌 “바보야, 문제는 스타일이야”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