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수사를 참 잘한다는 특수통 검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주변에선 그의 특기로 피의자로부터 자백받기를 꼽았다. 피의자에게 다른 범죄 혐의들을 들이밀며 협박할까, 부모·자식에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겠다고 압박할까. 아니면 철저한 수사로 꼼짝 못할 증거를 확보해 피의자가 도저히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까.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제발 자백해달라고 두 손 모아 싹싹 비는 거예요.” 우문에 우답으로 응수해 왔다. 기막힌 방법이라고 짐짓 감탄하니 피의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검사가 자신을 무도하게 짓밟으려 한다고 피의자가 생각한다면 자백을 쉬이 하지 않을 것이다. 검사가 사심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제대로 수사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피의자도 자백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검사와 피의자의 관계에서도 신뢰는 중요하다.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검찰이 그동안 세 차례 소환조사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 조만간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 같다. 이전까지 검찰이 현직 제1야당 대표를 소환조사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한 사례는 없다. 검찰로서는 역사의 한 장을 새로 여는 셈이다. 이 대표와 야당은 극렬하게 반발한다. 정진상·김용씨 등 최측근들이 잇따라 구속된 마당에 이 대표도 무작정 수사를 거부할 입장만은 아니다. 문제는 야당이 검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검찰이 집권세력과 한 몸으로 야당 말살을 목표로 수사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수사에 대한 의심과 반발이 안 생길 수 없다. 그 불신은 극단적 진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 정치 상황에도 기인하지만 검찰에게도 책임이 있다. 현 정부 들어 검찰의 정치권 수사는 이 대표 외에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탈북어민 북송 사건, 민주당 노웅래·이학영 의원 사건 등 오로지 전 정권과 야당 쪽으로만 향하고 있다.
정치판 한쪽 편에 선 선택적 정의
검찰은 이 대표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수원지검, 성남지청 등을 총동원해 지난 대선 때 제기됐던 모든 의혹을 샅샅이 훑고 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나온 이 사건 1심 판결을 보면 김 여사의 계좌가 주가조작에 활용됐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는 검찰의 현재까지 수사 결과이기도 하다. 계좌가 활용됐다는 것만으로는 주가조작에 가담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범죄에 사용된 계좌의 주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필요한데 검찰 수사는 감감무소식이다. 선택적 정의라고 지적받을 만하다.
과거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치권 수사에 최소한의 형평성을 맞추려고 애썼다.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에서 검찰은 야당인 한나라당뿐 아니라 여당인 새천년민주당도 철저히 수사했고, 양측의 핵심 인사들이 모두 사법처리됐다. 당시 수사는 국민적 지지가 이어졌다. 선거 때만 되면 대기업 등에서 징발하던 검은돈의 관행이 근절되는 등 성과도 컸다. 검찰의 정치적 형평성 맞추기 수사 관행은 단지 정치권에 대한 눈치보기 차원만은 아니다. 검찰이 특정 정파에 속해 있다는 인식이 형성되면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추락하고 수사는 동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검찰과 여당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다. 검찰이 수사하면 여당이 응원하고, 여당이 방향을 제시하면 검찰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검찰이 정치판의 한쪽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검찰이 수호자를 자처하는 법이나 정의, 이를 행사하는 검찰권은 절대적, 객관적 진리가 아니다. 신이 내려준 계율도 아니고 사과가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자연의 원리도 아니다. 종교, 국가, 윤리, 화폐 등처럼 인류가 수많은 충돌과 협의를 거쳐 형성해낸 사회적 타협의 산물이다.
신뢰 사라지면 상상의 질서 무너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리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상의 질서’” 중 하나다. 이 상상의 질서 덕에 사회가 유지되고 문명이 발전해 왔다. 그러나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상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과 강제가 필수적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 즉 구성원들의 신뢰가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신뢰가 사라지면 상상의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야권과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기나긴 재판이 이어지며 내년 총선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집권세력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일 것이다. 지금 검찰은 그 목적지로 향하는 다리 위에 있다. 그 다리를 건너가면 되돌아오기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