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품앗이와 마을 민주주의](https://img.khan.co.kr/news/2023/02/17/l_2023021701000757000060471.jpg)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 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 어매다
-시 ‘어떤 품앗이’,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

김해자 시인
나라가 어수선해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우리 동네가 딱 그 축소판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명함이 꽤 많고 복잡해 이해하는 데 몇 년 걸렸다. 직위가 ‘완장’이 되어 자기 이익을 위해 남용된다거나, 비밀이 많고 무능한데 독주하고 겁박까지 한다면 민심이 흉흉하고 갈등이 불거지기 마련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들, 씻고 옷 입고 밥 먹고 사람 만나는 일을 일용사(日用事)라 하고, 아주 드물게 하는 일을 기특사(奇特事)라 부른단다. 특별히 잘하면 ‘기특하다’는 칭찬이 되기도 하지만, 기특사가 지나치면 공동체든 개인이든 마음이 번잡하고 몸도 피곤하다.
이번 정월은 마을 선거라는 ‘기특사’로 출발했다. 이장선거 합의서를 마을회관 벽보판에 붙이고, ‘선거관리위원회’ 글자 박힌 기표소도 빌려오고 참관인도 세웠다. 마을 역사상 처음 선거를 치렀지만, 형식만 민주적인 선거로는 마을이 평온해지지 않았다. 사나흘 걸러 일이 생겼다. 2월 들어서는 쉬다 나가고 글 쓰다 나가고 잼 만들다 불려나갔다. 땅문서 관련된 법 따윈 모르고 살아온 나조차 공부하느라 바빴다. 공증이니 지분등기니 근저당 설정이니 하는 게 뭔지 찾아보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합유등기까지 알아봤다. 머리가 지근거리는 것들을 멀리할 수 없었던 건, 나를 ‘동생’이라 부르는 이웃 언니가 마을 공유재산과 관련해 가슴앓이해서다.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쉬고, 한 달 가까이 밥도 잘 못 먹고 있어서다. 대보름날, 찰밥하고 나물 서너 가지 후딱 만들어 전화하고, 농사도 열심이고 이웃 친척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살뜰히 챙겨주는 큰사람 아닌가.
이래저래 입춘과 함께 시작된 대보름 저녁은 회의하다 보냈다. 크고 둥근 달 아래서 들은 꽹과리 소리와 오곡밥 부럼 까먹으며 신나게 놀던 날들이 그리웠다. 마을회의는 큰소리도 오가고 살벌했으나, 주민들이 대거 참여해 의견들 내고 대책위도 꾸리면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윽박지르는 분위기가 발 못 붙이게 하겠다는 다짐과 결의와 방안들도 모색되었다. 두 쪽 나서 서로 원수 보듯 하는 마을들도 꽤 많다는데, 그 지경 직전에 브레이크를 건 셈이다.
번잡해서 내 자신의 일용사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겠으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데면데면하던 이웃들 이름이며 처지도 알게 되고, 회의 이후에도 삼삼오오 모여 의견도 나누고, 서로 방문하고 술 나누며 서로 살아온 얘기들도 나누며 동지애도 키워갔으니.
영영 녹지 않을 것 같던 꽝꽝 언 눈덩이가 스멀스멀 녹더니, 마늘 싹을 틔우려는 연노랑 촛대가 올라온다. 촉들이 올라오고 마른 가지에 잎눈이 피어나는 건 겨울을 견디며 봄날을 잘 준비해와서다. 내겐 얼마나 있나. 아프고 힘들 때 가만히 옆에 있어주기만 해도, 조금은 괜찮아져 툴툴 털고 일어나게 하는 친구와 이웃이. 문득 생각해본다. 어원이야 모르겠지만, 품앗이는 별말 없이 서로 품에 안아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민주주의는 거기에서 시작되는 거 아닌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