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에 있어)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행위는 군형법상 강간죄 또는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인 폭행·협박이 없었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22년 3월 서울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성폭력 혐의 해군 함장 등 장교 2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해군 장교 A씨는 성폭행 사실을 신고한 2017년부터 6년간 줄곧 위 문장과 싸웠다. 2010년 1차 평정권자이자 직속 상관 B씨는 성소수자인 A를 성폭행했다. 이로 인해 임신한 A씨는 중절 수술을 받은 뒤 함장 C씨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C씨는 상담을 빌미로 A씨를 성폭행했다. B씨는 A씨의 명시적 동의가 없었더라도 폭행·협박이 없으므로 강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C씨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13년 후인 지난 10일, C씨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그러나 해군상관에의한성소수자여군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활동가들은 이를 ‘절반의 진실’이라고 평가한다. ‘동의는 없었으나 성폭행은 아니다’라는 B씨 주장을 항소심에 이어 대법원도 받아들여 무죄가 확정됐기 때문이다. 윤경진 활동가는 13일 “폭행이나 협박이 동원되지 않더라도 (위계 등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많다”면서 “비동의 간음죄가 있었더라면 소송이 이렇게까지 길어지지 않았을뿐더러 B씨 처벌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비동의 강간죄는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성관계가 이뤄졌을 경우 폭행·협박이 없었더라도 성폭행이 성립하는 범죄이다.
경향신문이 13일 이 사건 원심과 항소심, 상고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1심 재판부는 B씨가 폭행·협박으로 A씨를 강간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군 검찰 조사에서 “B씨가 팔로 체중을 실으며 손목을 눌렀다” “침대로 끌고 가 내팽개친 후 몸으로 눌러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고 진술한 것을 근거로 이같이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항거 불가능 내지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폭행을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이어 “피해자의 진술이 허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각 공소사실 자체에서 강제추행을 위한 폭행 또는 협박의 행위가 있었다고 보이지 않으므로 강간이 아니”라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B씨가 체중을 이용해 A씨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도 “성관계를 시작하며 수반되는 일반적 동작이어서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은 항소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 사건을 대리한 조윤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는 “파기환송심에서 C씨에게 유죄가 나온 이유를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나이차가 많아 피해자가 동의하리라고 볼 수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이 있었다”면서 “비동의 간음죄가 있으면 동의 여부를 범죄 구성 요건으로 삼아서 판단을 하기 때문에, 나이 등 개별 사안에 대해 판단하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B씨 사건의 경우엔 실제 폭행과 협박이 있었다고 피해자가 주장했음에도 재판부가 신빙성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아 무죄가 나왔다”면서 “비동의 간음죄가 있다면 이 판단 역시 달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윤 활동가도 “비동의 간음죄가 있었다면 폭력·협박 부분에 대해 다투기보다 맥락을 고려할 수 있었다”면서 “입증이 어려운 부분을 길게 다투지 않아 재판 과정이 짧아지면 피해자의 피해 회복 면에서도 긍정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A씨는 파기환송심이 끝난 직후 기자회견에서 “오늘 법원의 판단처럼 두 가해자 중 다른 한 명 역시 유죄를 인정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이어 “판결을 기약 없이 기다리기도 힘들었지만, 헤아릴 수없이 많은 강제추행과 원치 않은 성교로 나를 범한 자가 위력에 의한 간음은 될 수 있으나 강간은 아니라는 취지로 (B씨가) 무죄로 풀려난 이후 하루하루 버텨온 날들이 무너질 만큼 참으로 견디기가 고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 이홍근 기자 redroot@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