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 마쓰모토 레이지가 2017년 3월 방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쓰모토 레이지(1938~2023)가 만화가의 꿈을 안고 도쿄로 상경한 것은 19세가 되던 1957년. 고속철도 신칸센이 없었던 당시 그가 살던 일본 규슈에서 도쿄까지는 열차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그의 대표작 <은하철도999> 주인공 철이가 탄 것과 같은 구식 좌석에 앉아 흥분에 휩싸인 채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떠올렸을 것이다.
만화가로 입지를 굳힌 1977년 마쓰모토는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은하철도999>를 ‘주간 소년킹’에 연재했다. 만화가 선풍적 인기를 끌자 이듬해 TV시리즈로도 제작됐다. <은하철도999>는 주인공 철이가 신비의 여성 메텔과 함께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의 몸을 제공하는 별을 향해 은하열차를 타고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숫자 ‘999’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미완성인 채 마감하는 청춘을 의미한다.
<은하철도999>는 한국에서도 1982년 TV로 방영돼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기계화로 영원한 삶을 얻는 대신 인간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수수께끼의 인물 메텔에 이웃나라 청소년들도 열광했다. 소년들은 철이와 메텔의 이별에 아파하며 어른으로 성장했다. <은하철도999>는 애니메이션을 넘어 기계와 인간의 공존, 시공간과 영원한 삶 같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철학 교재였다. 영생을 얻기 위해 정신을 기계에 의탁하는 사람들, 인공지능(AI)이 통제하는 기관차 같은 설정은 챗GPT가 세상을 바꾸고 있는 요즘 봐도 신선하다.
<은하철도의 밤>과 함께 벨기에의 문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도 작품의 모티브가 됐다고 한다. 행복이란 이름의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틸틸과 미틸의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 희곡으로, 메텔이란 이름도 마테를링크에서 따왔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찾는 여행자, 희망의 별에 닿을 때까지 계속 나아가야 해. 언젠가는 너도 반드시 만나게 될 거야. 조그만 파랑새를.”(<은하철도999> 일본판 오프닝 테마송 가사 중)
마쓰모토가 지난 13일 파랑새를 찾아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딸 마키코가 쓴 추모글대로 ‘먼 훗날 시간의 고리가 닿는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가 탄 은하열차의 기적 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