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머릿속을 꽉 채우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한국은 도대체 왜 한국이 되었을까?’ 그러니까, 다른 것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김치나 한복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것은 외국인 대상의 한국어 초급 교재 정도다. 한국 땅 밖에서 실제로 만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세 마디 주고받은 후 영원 같은 침묵이 흐를 것이라는 감은 그 누구에게라도 온다.
뒤늦게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봤는데, 제도상 신분제가 폐지된 근현대 시기 외국어 능력이 사회 권력구조 내 개인의 위치를 뒤바꾸는 흐름을 생생하게 그린 부분이 흥미로웠다. 한국이 한국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원가족이 최빈곤층이었지만, 대학 전공을 바꿔 공부 기간을 늘리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영문학을 전공하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태어나 보니 한국인이라 이런 생각을 낯설게 여겨본 적이 없는데, 지금 보면 위로는 북한이, 나머지 삼 면으로는 바다가 둘러싸고 있는 지리적 조건은 상당히 특수하다. 금융자본도 ‘인적 자원’도 국제적으로 흐르는데, 개인이 모른 척한다고 없어지지 않는 것이 구조다. 하여간 나는 특별하지 않아서, 한국인으로서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답답하지 않은가?
지난 칼럼에서는 한국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세상에서 제일 빠르게, 값싸게 공사하다 죽은 사람들의 위령탑이 있는 경부고속도로가 낯설다고 썼다. 말하자면 불굴의 의지를 함양토록 하는 것이 한국인-되기다. 토익? 한 달 동안 완성한다. 자격증? 최신 기출문제 답안을 외운다. 이렇게 만들어진 ‘완제품’ 한국인은 ‘토 달지’ 않고 빨리 움직이는 것이 자랑인 노동력이 된다. 우리는 안 되는 걸 되게 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한 건 문제가 아닐까?
외국인을 넉살 좋게 그리는 전형적인 연출이 있다. 출연자가 서투른 한국어로 ‘빨리빨리!’ 하고 외치는 모습을 담는 것이다. 한국 잘 아네! 받아치는 한국인의 얼굴에는 뿌듯함도 서려 있다. ‘외국이 느려서 답답했다’는 한국인끼리의 공감 형성도 단골이다. 최근 친구가 일본에 전자서명 시스템 대신 종이 서류에 도장 찍는 기계가 있다는 글을 보여 줬는데, 그러니까 우리끼린 이게 웃기다는 거다. 그런데 정말 웃긴가?
홈리스를 처음 지원할 때면 공공 서비스 이용을 위해 스마트폰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전화기도 통신망도 ‘고객님’한테 서비스되는 것이다. 나는 노트북 없이 대학에 갔는데, 학교 공용 컴퓨터 여기저기 공인인증서를 설치해야 등록금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종이 서류를 내는 사람이 ‘그냥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모두가 ‘그런 사람이 요즘 어디 있냐’고 생각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웃긴가?
최근 한국이 경신한 세계 기록은 최저 합계출산율이다(2022년 0.78명). 일 년 전 기록 경신 때까진 나도 이 문제에 대해 열심히 말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놀라지 않아 호들갑 떨기가 민망하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게 ‘빨리빨리’의 핵심적인 장애물이라는 걸, 그러면 필시 망한다는 걸 모르는 한국인이 없다. 사람은 당연한 것에 놀라지 않으니까, 아마도 이게 또 ‘한국적인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