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화가인 사샤(38)는 지난 5일(현지시간) 망명한 러시아인으로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 묻자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두 시간 남짓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인 남편 파샤(40)와 함께 돈바스 전쟁 다음 해인 2015년 7월 핀란드 헬싱키로 이주했다. 그리고 지난해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 국적을 버리고 핀란드로 귀화를 신청했다.
“푸틴은 평화의 개념마저 오염시켰다”
그는 헬싱키로 이주한 뒤에도 한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며 살았다. 대중교통으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두 도시를 오가는 건 전쟁 전까지만 해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는 것이 두려워졌다고 말했다.
“공공장소에 대한 겁이 생겼어요. 어디에 가든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부의 프로파간다(선전)를 만나게 돼요. 지하철역이나 광장에 가면 경찰이 너무 많아서 빨리 지나가고만 싶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뉴스를 보면서 평범하게 책을 사고 일상생활을 하는 제 자신에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샤는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음식과 옷, 의약품 등을 보내는 캠페인에 기부도 하고 가끔씩 자원봉사에도 참여했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자는 캠페인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모든 무기와 살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침략국인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평화주의 신념조차도 괴로운 일이 됐다.
사샤는 차이콥스키나 도스토옙스키 등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일각의 목소리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차이콥스키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예술은 원래 감정에 기반합니다. 보이콧은 차이콥스키나 도스토옙스키를 역사에서 영원히 지우려는 시도가 아니라, 지금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시작부터 침울했던 사샤의 표정에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사샤의 남편 파샤는 자신이 입은 티셔츠에 적힌 ‘노 푸틴 노’(NO PUTIN NO)라는 문구를 보여줬다. 그는 헬싱키에 거주하는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과 함께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벌이고 있다. ‘노 푸틴 노’ 티셔츠를 제작해 판매한 수익금은 모두 우크라이나인 지원 단체에 기부한다. 핀란드의 유명 연예인들도 티셔츠 캠페인에 동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파샤는 ‘노 푸틴 노’ 캠페인을 하는 가장 큰 이유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술가와 지식인 사회에서는 푸틴 정권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는 좌절과 비관이 더욱 커졌다.
옛 소련 시대 이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금처럼 시민사회의 숨통이 완전히 막힌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2011년 총선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2020년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5연임이 결정됐을 때 항의 시위가 일어났던 것이 단적인 예다.
파샤는 “내가 러시아 사람이란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 자체를 포기한 적은 없다는 자부심이었다”며 “여기서 멈추면 우리는 진짜 ‘러시아 돼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샤의 할아버지는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지대인 카렐리야 출신이다. 카렐리야는 겨울전쟁으로 소련이 핀란드에서 빼앗아 간 땅이다. 카렐리야의 핀란드 주민들은 러시아 국적을 택한 동족을 ‘러시아 돼지’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국경을 바꾸는 전쟁이 사람들 사이에 새겨놓은 깊은 상처와 분열이 담긴 멸칭이다.
파샤는 전쟁 이후 반러 정서가 높아지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찬성 여론이 높아진 상황에서 러시아인에 대한 배척 정서가 생겨날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를 비롯해 공공장소에서는 치열하게 전쟁에 대해 논의하고 토론했다. 파샤는 “창피함을 느꼈다”고 했다.
파샤는 ‘반전’보다 ‘반푸틴’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셔츠에 새기려던 원래 구호도 푸틴 반대 전쟁 반대(NO PUTIN NO WAR)였는데 글자를 너무 크게 디자인하는 바람에 ‘전쟁’은 잘리고 ‘노 푸틴 노’가 돼 버렸지만 마음에 들어 계속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 평화란 개념이 오염됐습니다. 전쟁 초기 반전운동이 일어나니까, 러시아 당국은 이렇게 선전하기 시작했어요. ‘러시아 역시 평화를 원한다’ ‘우크라이나에서의 활동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나토가 핵을 이용해 러시아를 침략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는 평화가 아닌 명확한 반푸틴 선언이 필요합니다.”
러시아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빼앗긴 러시아 예술가들
파샤가 ‘노 푸틴 노’ 운동을 벌이는 동안 사샤는 좀 더 개인적인 일에 집중했다.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슬로뱐스크에 자신도 몰랐던 친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돈바스 내전으로 2014년 아버지를 잃고 쉼터를 전전하며 커 온 6촌 동생이었다.
6촌 동생은 지난해 여권이 나오는 18세가 되자마자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 지역을 빠져나와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혼자 살고 있다. 동생을 당장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왠지 두려워 오랫동안 망설였다. 파샤의 설득으로 겨우 용기를 내 만날 수 있었다.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니까 놀이공원에 가는 게 소원이래요. 놀이공원에 가서 셋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린아이가 전쟁과 미사일 속에서 커 왔으니, 그동안 마음껏 소리치고 감정을 발산할 기회가 없었던 거에요.”
사샤는 전쟁 이후 일부 지식인들이 말하는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이 전쟁을 불렀다’는 진단에 단호히 반대한다. “저는 러시아인인데도 러시아를 떠났잖아요. 지금의 러시아는 이웃나라에 친구가 될 수 없는 나라에요.” 사샤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2월 21일 사실상 우크라이나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던 TV연설에서 ‘루스 공동체’를 언급했다. 고대 루스인에서 갈라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민족을 일컫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푸틴의 전쟁 이후 정작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했던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유대와 삶은 파괴됐다.
사샤는 “더 이상 내가 러시아인이란 사실이 즐겁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사샤는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러시아 문화에 소속돼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은 그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아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갈 수 없게 된 것도 너무 큰 상실감이라고 말했다. “저에게 우크라이나는 가장 친근하고 따뜻한 이미지의 이웃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우크라이나에 갈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요.”
그렇지만 사샤는 꿈꾼다. 언젠가 6촌 동생과 함께 평화를 되찾은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는 꿈이다. “지금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꿈이죠. 제가 70살, 80살이 된다면 혹시 가능할까요. 인생의 대부분이 지나간 후가 되겠지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