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한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노동자들이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지하철에서 일하는 50~60대 여성 청소노동자의 3명 중 1명 이상이 여성 비하 욕설 등 언어적 성희롱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1명은 불쾌한 신체 접촉이나 안마 등을 요구받았다. 가해자는 대부분 고용주 혹은 상사(71%)였다.
서울 지역 노조·시민사회단체 연대 조직인 ‘너머서울’은 지난달 5060 여성 지하철 청소노동자 78명을 대상으로 직·간접 성폭력 피해 경험을 조사한 결과 이 같이 드러났다고 28일 밝혔다.
지난달 2호선 역사에서 청소 업무를 담당하는 60대 여성 노동자가 관리직 팀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발한 것을 계기로 진행된 조사다.
주로 지하철 역사의 청소·미화 직무를 맡은 이들은 35%가 여성을 비하하는 욕이나 음담패설 등 언어적 성적 괴롭힘을 겪었다고 답했다. 외모 평가를 당한 경우도 14%였다. 안마 등을 요구받거나(15%) 의도적인 신체 접촉을 당한 경우(13%)도 있었다. 폭언과 폭행을 경험한 노동자도 12%였다.
지하철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 같은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은 연 1~2회 이하(79%)로 발생했다. 일주일에 1~2회(11%) 겪는 경우가 뒤를 이었다.
폐쇄된 지하철역 공간은 휴식 시간 혼자 머물게 되는 노동 환경 탓에 직원들이 성추행 피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남성인 팀장들은 하루 1~2번씩 순회하며 업무 지시 등을 위해 수시로 노동자들이 머무는 휴게실을 드나든다. 야간 전담반은 오후 9시나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늦은 밤에서 새벽 시간에 혼자 있어 더 취약하다.
특히 이번 설문 참여자들을 보면 64.7%가 비정규직, 70.5%가 간접고용 상태였다. 불안정한 고용 상태와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인 셈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응답 54명) 가운데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15명)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중년층인 노동자들이 가족 등이 알게 될까 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기를 꺼리는 경향도 크다. ‘상대방과 서먹해질까 봐’ ‘당황해 방법을 몰랐다’ ‘대응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아서’ ‘업무상 불이익’ 등을 들어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적극적인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조나 직원협의회에 상담(13명)하고 상사 또는 직장 내 고충처리기구에 문제 해결을 요청(5명)하기도 했다. 노동부(3명)와 국가인권위(3명), 경찰(4명)에 신고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가해자에 대한 조치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응답이 63%를 차지했다. 징계·해고(각 4%)나 부서이동·개인적 사과(각 3%)는 소수에 그쳤다. 이 같은 미비한 조치로 응답자의 21%는 가해 행위가 고쳐지지 않고 지속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도 피해 사실에 대한 조직 내 공감이나 지지가 없고(22%) 피해자에 대한 압력(17%)이나 의사에 반한 합의(13%)가 강요되는 분위기도 피해자들을 힘들게 한 요소다. 불공정한 조사, 사건 처리 지연(각 18%)도 문제를 제기할 의지를 꺾었다.
이번 설문을 진행한 너머서울 젠더팀 여미애 공동팀장은 “성 역할을 당연하게 구분하는 조직 분위기 탓에 팀장이 좋아하는 반찬이나 과일을 휴게실에 채워놓는 상납 구조도 존재했다”며 “일상적 언어 성희롱에도 ‘마지막 직장’에서 해고나 부당 전보를 당할까 우려해 노동자들이 참는 관행은 위계 구조에 의한 성적 괴롭힘”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운영기관인 서울교통공사의 역장 출신 등이 퇴직 후 청소 용역업체나 자회사 팀장급 중간 관리자로 배치되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이경옥 민주노총 서울본부 여성위원회 위원장은 “1~2년 단위로 재계약이 이뤄지는 청소용역업체에서 생활임금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 크다”며 “공사의 자회사나 청소 용역업체의 소장 및 팀장급은 전국환경노조에 소속돼 청소 노동자를 관리하는 현장 최상위 권력자”라고 설명했다.
- 사회 많이 본 기사
이에 피해를 공론화한 이들은 2차 피해를 겪었다.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내거나(복수응답 19%) 직장 내 평판이나 피해 내용을 유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용·업무상 불이익(각 17%)을 당했다는 응답 비율도 높았다. 집단 따돌림과 폭언(13%)도 있었다.
너머서울 젠더팀 상현 공동팀장은 “서울교통공사 차원의 성폭력 대응 지침, 관련 규정은 존재하지만 청소 위탁 업체까지 해당 사항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문화가 만연한 조직 특성상 관련 지침이 있어도 적용이 어렵다.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구성원들의 사내 문화 개선 고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