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과 ‘육두구의 저주’

손희정 문화평론가

얼마 전, 급체에 걸려 고생을 좀 했다. 문제의 음식은 라면이었다. 전날 밤 늦은 시간에 유튜브 먹방 알고리듬에 걸려들어 침샘이 폭발하는 시련의 밤을 보내고 나서, 오전 일정을 마치고 허기진 김에 분식집에 들어가 라면을 주문했다. 한꺼번에 열라면 여덟 봉을 끓여먹던 그가 참 맛있게도 먹었던 덕분이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먹는 내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밤에 본 것이 비단 먹방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고리듬을 타고 보게 된 영상들의 키워드는 바디프로필, 헬스 브이로그, 간헐적 단식, 다이어트 레시피, “한 시간씩 줄 서는 호떡집”, 프로아나(극단적으로 마른 몸을 지향하는 사람), 항정신성 식욕억제제와 그 부작용, 그리고 “곱창이 땡겨 먹다보니 10㎏” 등이었다.

많이 먹건 먹지 않건, 미식을 하건 괴식을 하건, 신경 쓰며 먹건 그냥 먹건, 어떤 형태로든 ‘먹는다’는 행위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사회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참 기이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먹방이 자극한 식욕을 채우기 위해 라면을 먹고 있는 내 자신에 당혹감을 느꼈다. 결과는 위장의 파업.

각종 노하우를 동원해 위를 달래는 와중에 활명수를 마셔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활명수는 또 뭐로 만들어진 건지 궁금해졌다. (‘유튜브 속 이상한 나라’에 갇혔던 것도 사실 이런 호기심 탓이었을 텐데.) 이번에는 활명수의 성분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재료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육두구였다.

육두구는 유럽 제국주의 침략사의 정점을 장식하는 향신료다. 육두구 나무는 인도네시아의 반다 제도를 중심으로 번식했다. 1600년대 초, 이 향신료의 가치를 깨달은 네덜란드인들은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려 한다. 대대로 육두구를 재배하고 판매해온 반다인들은 다양한 수완을 발휘해서 네덜란드의 무역 통제 시도에 저항했다. 하지만 반다인들이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야수(brute)”라고 생각했던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을 말살해 버린다. 아미타브 고시의 논픽션 <육두구의 저주>는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단 몇 개월 만에 자부심 넘치고 진취적인 무역 공동체였던 반다족은 더 이상 하나의 민족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세계는 10주도 안 되는 기간 사이에 종말을 고했다.”

무역 독점 후 육두구의 가치가 떨어지자, 네덜란드인들은 반다 제도 외부에서 서식하는 육두구 나무를 말살하겠다고 나선다. 공급을 줄여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아미타브 고시는 책에 이런 말을 인용한다. “일단 세계를 죽은 것으로 상상하기만 하면, 우리는 세계를 실제로 그렇게 만드는 데 매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반다인과 육두구 나무는 반다 제도 밖에서 살아남았다. 반다인들은 여전히 “육두구에 대해 노래하고, 잃어버린 선조와 땅에 대한 기억 속에 그 나무를 엮어 넣는다.”

먹방을 즐기는 우리도 이런 근대적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한 끼에 곱창을 10㎏씩 먹고 캡사이신에 버무린 김치를 두 포기씩 먹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먹는 것은 땅, 바다, 공기에서부터 풀과 동물 같은 생명을 지나, 그걸 기르고 잡고 가공하고 운송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내가 아닌 존재들에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먹을 것을 마련하는 과정이 추상화된 시대에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연루되어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삼킨다.

먹방을 비롯해서 유튜브에 넘쳐나는 먹거나 먹지 않는 행위를 다루는 동영상들은 풍요의 증거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 사회가 더욱 척박해지고 있다는 증거에 가깝다. 예전에는 존재했던 생명들 간의 관계를 잃어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기후위기만큼이나 나의 급체도 육두구와 그의 동료들이 보내는 경고 혹은 저주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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