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라는 건강권 ① 의사들의 고민
‘낙태죄’가 폐지된 지 곧 4년이 된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낙태죄를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임신중지는 범죄 굴레를 벗었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임신중지를 ‘어디서, 어떻게, 얼마에’ 할 수 있는지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구하는 주요 통로는 여전히 인터넷 검색이다.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은 들쭉날쭉이고, 세계보건기구(WHO) 필수의약품인 유산유도제도 국내에선 정식으로 구할 수 없다. 형법·모자보건법 등 관련법 개정도 안됐다.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하고 정부는 ‘입법 공백’을 핑계로 손을 놓고 있다.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적 가이드라인이 없어서 현장의 의료진은 ‘모든 것을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임신중지는 보편적인 건강권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3·8 여성의 날을 앞두고 임신중지가 보건의료서비스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2회에 걸쳐 조명했다. 1회에는 임신중지 시술을 제공하는 의사들의 고민을 담았다. 2회는 국가의 필요에 좌우된 여성의 건강권, 임신중지 관련 공적 정보체계 부재, 유산유도제 미도입 등의 문제를 짚었다.
임신중지의 적정 비용은 얼마일까? 최예훈 색다른의원 원장은 지난해 여름 개원을 준비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임신중지 시술은 건강보험(건보)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다. 환자가 전액을 부담한다는 뜻이다. 시술비는 병원마다 다르다. “비급여 수가는 병원이 각자 정해요. 페이닥터로 있을 때는 신경을 안 썼죠.” 그런데 병원을 직접 운영하려면 시술비를 정해야 했다. “진짜 고민됐어요. ‘이렇게 임의로 가격을 정한다고?’ 혼란스러웠죠. 원가에 기기 비용, 인건비 등을 고려하고 특히 주변 병원 시세를 감안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어요.” 이혜연 삼성봄그린산부인과의원 원장도 개원을 준비하며 같은 고민을 했다. “비싸게 받자니 돈 벌려고 하는 것 같고, 너무 싸게 하자니 그것도 좀 그렇고…. 보통 비급여 가격은 주변 병원을 봐서 정해요. 주변보다 너무 낮거나 높지 않게. 그래서 다 비슷해져요.”
2023년 현재 임신중지 평균 비용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비급여인데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도 없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에 ‘임신중절 비용’을 검색해 봤다. 서울을 기준으로 ‘7주 70만원, 8주 80만원’ 등 임신 주수에 따라 달리 광고하는 곳이 많았다. 이 원장은 말했다. “보통 임신인 줄 모르고 오는 분들은 생리주기가 불규칙해요. 그럼 초음파로 처음 볼 때 주수를 추정하죠. 크기가 1~2㎜만 달라져도 주수는 바뀌어요. 그런데 7주6일은 70만원이고 8주1일은 80만원? 7주6일은 70만원만큼 위험하고, 8주1일은 80만원만큼 위험할 것 같아요? 그렇게 차이 없거든요. 주수가 늘수록 조금 더 위험할 수는 있어요. 그렇다고 10만원씩 올라가는 건 이상해요. 누군가가 그렇게 하니까 다들 그렇게 하기 시작한 건데, 이상하죠.”
최 원장도 같은 의견이다. “임신 주수에 따라 위험률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건보 적용되는 수술도 8주, 12주, 16주, 이런 식으로 수가가 올라가요. 그래도 임신 초기에 일주일 지났다고 10만원씩 올리는 건 비합리적이에요. 초기에는 술기(수술법)나 시간적 비용 등 여러 면에서 큰 차이가 없거든요.”
김새롬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는 “암 수술을 누구는 200만원, 누구는 2500만원에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안 받아들일 것”이라며 “임신중지는 병원마다 가격을 달리 할 수 있고, 환자는 협상력이 없어서 내라는 대로 내거나 (돈이 없으면) 시술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고민도 판단도 의사 몫…여전한 부담
대학병원 의사들의 고민 지점은 개원의와 약간 다르다. 오정원 순천향대서울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 병원에서 유일하게 임신중지 시술을 하고 있다. 병원에는 아직 임신중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후속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고, 병원 내 논의도 없었던 탓이다. 임신 몇 주까지 시술이 가능한지, 시술 전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이렇다 할 지침이 없다. 고민과 판단, 책임까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하나하나가 고민이에요. 보통 의료시술 전에 일정한 양식에 따른 설명문이 포함된 동의서를 받도록 돼 있어요. 하지만 임신중지는 병원에 공식적인 동의서 양식이 없어요. 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한 동의서를 임의로 만들어 서명을 받고 있어요. 충분한 설명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의료진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어요. 임신중지는 아직 병원, 학회의 ‘컨센서스’가 없기 때문에….”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공의나 간호사 등에게는 참여 의사를 확인하곤 한다. “그분들이 이 의료 행위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설명을 하고, 혹시 원치 않으면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요. 아직까지 안 하고 싶다고 한 분들은 없었어요.”
대부분의 임신중지는 초기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대학병원급의 큰 병원에 임신중지를 문의하는 사례 중에는 드물지만 임신 후기에 장애나 기형을 발견한 경우도 있다. “(그런 케이스는) 저 혼자 충분히 상담할 수가 없어요. 소아과, 소아외과, 유전분과 등 다학제팀이 필요한데, 그런 팀이 꾸려진 병원이 몇 개 안돼요. 일부 상급종합병원에서만 그런 상담을 제공할 수 있고, 대부분 아이를 낳는다는 전제로 상담이 진행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기관을 당사자가 찾아다니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냥 한두군데 가보고 빨리 결정해야 하는 상황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 대한 부담 역시 오롯이 의사 몫이다. “이 문제는 공론화하기 너무 어려워요.”
시민건강연구소는 지난해 발간한 ‘임신중지를 의료로서 보장하기’ 이슈페이퍼에서 “산전에 장애나 기형이 진단되고 산모가 임신의 종결을 요구하는 경우 의사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공적 논의가 부재하다”면서 “태아나 산모에 불확실한 건강 결과가 예상되는 복잡한 임신에서 어떻게 더 좋은 의사-환자 관계를 형성하고 환자 중심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임신중지는 의사와 환자 간 관계에 따라 의료서비스 제공 여부가 결정되기도 하는 특수성도 있다. 이 원장이 페이닥터로 근무했던 분만병원에서 겪은 일이다. “오래 근무한 선생님들 자신에게 와서 첫째와 둘째를 낳은 임신부가 40대 중반에 갑자기 셋째를 가져서 ‘저 못 키워요’ 하면 시술해주기도 했어요. 그 산모와 ‘라포’(신뢰관계)가 오래 쌓였으니까. 알음알음 몰래 해준거고, 그건 원장님도 뭐라고 안 했어요.” 오 전문의도 “선생님들 중에서 처음 본 사람이 ‘임신중지 해주세요’라고 하면 거절하지만 지인, 아니면 내가 이미 아이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시술해주기도 한다”며 “이런 건 2019년 이전과 이후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임신중지가 보편적인 의료서비스로 자리잡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임신중지는 어떻게 보편적 의료서비스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임신중지를 시행하고 있는 의사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시술을 안하던 의사들이 낙태죄가 없어졌다고 ‘그럼 나도 이제 해야지’로 바로 바뀌는 건 아니에요.”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가 말했다. “아직 건강보험 적용도 안 되고, 관련 교육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경험없는 의사들이 시작하긴 어려운 조건이죠. 의사 개인에게 ‘법 바뀌었는데 너 왜 안해?’라고만 할 순 없어요. 의대 교육, 학회의 보수 교육이나 워크숍, 건강보험 적용 등이 뒷받침 되어야죠.”
A씨는 재작년 의대를 졸업한 2년차 의사다. 낙태죄 폐지 운동이 한창일 때 의대생이 됐고, 졸업 직전 낙태죄가 폐지됐다. 그는 학생 때 산부인과 임상 강의에서 ‘임신의 유지와 출산’에 대해 배웠지만, ‘임신의 종결’에 관해 배운 적은 없다. “교수님들은 대부분 (‘출산 장려’라는) 국가 정책과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거나, 더 보수적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강의문 도입부에 ‘산과학은 국가의 재생산을 보조하기 위한 정책의 관점에서 중요한 학문’이라고 쓴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기성 의사들이 사회 진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교에서는 임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출산을 건강하게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주로 배우고, 임신종결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고 보면 돼요.”
A씨보다 훨씬 앞서 의사가 된 최예훈 원장도 같은 교육을 받았다. “배운 것은 없지만 다들 알죠. 현실적으로 나가면 다 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산부인과 전공의 수련 과정에서 관련 케이스를 접할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는데, 난임 시술도 안 하는 가톨릭계 병원에서 전공의 생활을 한 그에겐 그럴 기회도 없었다.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찬성이냐 반대냐’라는 납작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때였다.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의사, 임신중지 당사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도 훨씬 강했다. 그는 전공의 과정을 마친 뒤 임신중지 시술을 많이 하는 병원에서 일하며 내적 갈등을 겪다가 관련 시술을 제공하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그러다 낙태죄에 관한 세미나에 우연히 참석한 것을 계기로 공부를 시작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됐다.
“저는 답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산부인과 의사라고 성과 섹스에 대해 전문가인 척하고 살았는데 너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젠더가 뭘까’부터 시작해서 제 일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임신중지에 관한 제 입장은 전 어쨌든 당사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의료인으로서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환자의 결정을 잘 돕고 지원하는 게 제 일이에요. 임신중지는 여러 사회적 맥락이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잖아요. 이게 말은 쉬운데, 저 스스로도 공부하고 납득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어요.“
임신중지가 보편적 의료서비스가 되려면
임신중지가 비범죄화 됐지만 사실상 모든 것이 ‘공백’ 상태인 우리나라의 상황은 세계적 추세와도 동떨어진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임신중지 약물인 ‘미프진’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가이드라인도 마련해 놓았다. 윤 전문의는 “임신중지 합법화 이후 음지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해 왔던 분들이 앞으로 나와 (사회적) 발언을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면서 “임신중지의 사회적 맥락이나 학술적 측면, WHO의 인권 기반 가이드라인을 계속 소개하고, ‘이것이 메인 스트림’ 이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더 커져야 하는데 잘 안 되고 있다”고 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지난해 전국의 산부인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임신중지 워크숍’을 열었다. 임신중지를 약물적, 수술적, 행정적 측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구는 어디서 어떻게 사 와야 하는지 같은 실무에 관한 워크숍이었다. “전부터 시술을 해온 분들의 경험을 듣는 ‘케이스 스터디’도 했죠. 하루짜리 워크샵이었는데 350명이 넘는 분들이 신청했고, 끝까지 이수한 분들이 200명이 넘어요. 교육에 대한 수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캐나다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임신중지 관련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 윤 전문의는 “의사들이 원하면 단기 연수를 하는 등 의료인들을 키워내는 작업을 각 주 정부가 개설한 여성병원에서 하고 있다. 그런 식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오 전문의는 전공의들에게 임신중지 관련 교육을 실시 중이다. 그는 “임신중지를 주제로 의사-환자 시뮬레이션을 시킨다던지, 관련 조사를 시키고 발표, 토론을 한다”고 했다.
건강보험 적용 논의도 시작돼야 한다. 윤 전문의는 “급여화는 의료계에 임신중지가 ‘의료서비스’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최 원장은 “임신중지 관련 연구든 정책이든 데이터가 있어야 되는데 지금은 다 비급여로 해 놓으니까 알 수 없다. 보험이 되면 임신중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통계가 잡힐 것”이라며 “의료인 입장에서도 더 당당하게 의료서비스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임신중지 시술의 질을 관리하는 측면에서도 급여화는 필요하다. 윤 전문의는 “보험이 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퀄리티 컨트롤’을 해요. 어떤 시술을 꼭 필요한 상황에서 했는지 등이 모니터링되는데, 지금은 그게 빠져있는 거죠.” 사실 임신중지의 일부 단계는 이미 건강보험 체계 안에 들어와 있다. 보건복지부는 2021년 임신중지 관련 ‘상담 수가’를 책정했다. ‘상담’까지는 급여인데 ‘상담 이후’는 비급여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급여화가 될 경우 수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산부인과 의사들이 관련 논의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한다. 최 원장은 “그건 상관없다. 돈을 환자에게 받느냐, 건강보험 공단에서 받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의사는 보험이 되는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라면서 “개원의들은 급여화를 반대한다기 보다는 적정 수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도 “지금 상태로 두는 게 의사들이 돈 벌려고 시술한다는 인식을 더 강화시킨다”면서 “공적 영역으로 들여와서 정당하게 하면 좋겠다. 임신중지는 건강권의 문제기 때문”이라고 했다.
‘적정 수가’를 정하려면 정교한 논의가 필요하다. 윤 전문의는 “수가는 얼만큼의 시간과 기술, 자원이 소요되는가,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투입되는가, 무슨 약재가 쓰이는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책정된다. 그래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계류 유산 등에 적용되는) 기존 수가는 낮은 편인데, 수가를 너무 낮게 할 경우 관련 시술을 제공하려는 의사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임신중지 급여화 계획을 질의한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보낸 답변에서 “건강보험을 우선 적용할 경우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보장하는 임신중지 범위와 충돌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형법, 모자보건법 등 관련법 개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취지다. 복지부는 “법 개정 상황, 여성 건강 보호 관점 등 여러 의견을 감안하고, 건강보험정책심의위 등 건강보험 적용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정부가 법 개정 이전에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까지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셰어(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의 나영 대표는 “(비범죄화 이후에도) 제도적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정부가 임신중지를 건강권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가 ‘임신중지는 건강권’이라는 원칙을 확인하고 여러 당사자 간 이해관계 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의료현장에서는 임신중지가 보건의료체계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법이 없어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정부가 댈 핑계는 아닌 것 같다”면서 “오히려 정부가 현장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타미플루 구하려고 엄청 노력했잖아요. 중요하면 그렇게도 하는거죠. 미프진 도입은 국민 청원까지 해도(...) 적극적 행정을 하지 않겠다는 거죠.”
— 플랫 (@flatflat38) March 17, 2023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후, 국가는 입법 공백을 핑계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건강권에 개입하고 있다.https://t.co/rO4kKU5Uk7
▼ 김한솔 기자 hansol@khan.kr · 박하얀 기자 white@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