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물어보면 인공지능이 답해주는 챗GPT 탓에 대학가에 비상이 걸렸다. 공문을 통해 학생들이 인공지능 챗봇을 이용해 과제를 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교강사들이 문제를 설계하고 해답지를 체크하는 데 조금 더 공을 들이라는 권고가 이어진다. 이러한 권고는 역설적으로 대학이 챗GPT와 맞서 싸울 어떠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자백이다. 거대한 시스템으로 막아낼 수 없기에 개개 교강사의 곡예로 해당 상황을 막아야만 한다.

이융희 문화연구자
오래지 않은 대학 강의 경력에서 비슷한 풍경을 본 적 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처음 시작되었을 무렵 학교의 교강사들에게 내려왔던 공문이 이러했다.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학교가 해줄 수 있는 기술 지원이나 공간 지원은 한계가 있으니 교육의 퀄리티를 확보하기 위해 교수들이 알아서 인터넷 강의 시대에 교육 환경을 구축하라는 권고가 이루어졌고, 결국 교강사들은 각자의 속도 편차대로 온라인 강의 전환을 마무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갖가지 해프닝이 온라인에 회자되었다.
챗GPT를 둘러싼 논란도 비슷할 것이다. 챗GPT를 하나의 툴이나 조별 과제의 파트너처럼 이해하고 도구로써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한 방법론과 그 교육을 고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전적인 강의 방법을 챗GPT에 의해 모조리 해체당한 채 기계를 위한 기계로 전락해버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혼란도 다른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하지만 챗GPT와 대학 관계의 본질은 위와 같이 학생들의 챗GPT 사용을 교강사가 검열하는 데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학생들이 챗GPT를 과제에 쓴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과제의 기능은 학생들이 강의로 들은 내용을 학습하고, 그 내용을 스스로 적용해 보고 비로소 아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학습 내용을 스스로 곱씹고 익히기 위해선 학생 스스로가 챗GPT를 거부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챗GPT를 통해 과제를 수행하는 건 교수자나 대학이 학생에게 과제 수행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며 학생들이 교수자가 전달하는 학습 방법과 커리큘럼을 기계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소리이다.
이러한 실패엔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리라. 최근의 대학이 더 이상 학습을 위한 상아탑이 아니라 취업 사관학교로 전락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터. 그저 대학 졸업장을 라이선스처럼 획득하기 위한 학생들에게 과제란 안정적인 학점을 얻기 위한 짧은 노동과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수업의 과제가 인공지능의 어설픈 대답만으로 뚜렷한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로 관습적이고 고전적으로 설계된 탓도 있으리라. 학점을 변별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설계한 과제들이 기계에 의해 역습받은 셈이며, 학생들은 이러한 기계를 이용한 일종의 해킹으로 대학 그 자체를 해체하는 셈이다.
코로나19와 비대면 수업은 대학 공간을 해체하고 대학의 학습이란 무엇인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챗GPT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에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마주하며 관습적으로 해오던 구조에 대해 비로소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