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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문법’의 쓸모

입력 2023.03.09 03:00

수정 2023.03.0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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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미래] ‘장르 문법’의 쓸모

컴퓨터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답은 시드 마이어다(너무 쉬웠나). ‘시드 마이어의 해적!’이란 게임도 있다. “기존의 서사가 플레이어를 ‘해적!’에 몰입하게 하는 열쇠였다. 흰 셔츠에 화려한 허리띠를 두른 사람이 주인공이고 검은색 롱코트에 안대를 한 사람은 악당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시드 마이어는 자서전에서 이것을 “문화적 지름길”이라고 불렀다.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다. 문화적 지름길은 게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드라마와 웹툰과 웹소설 등 대중문화 장르에서도 즐겨 쓰인다. 업계에서는 이를 ‘장르 문법’이라고 부른다.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 만화가

문화적 지름길, 장르 문법 등 무어라 부르건 이 방법은 너무나 쓸모 있기 때문에, 창작자들은 옛날부터 이걸 사용했다. 예를 들어, 중국 전통 연극에서는 얼굴을 어떤 색깔로 칠하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드러난다고 한다. 하얀색은 조조, 붉은색은 관우 같은 성격. 감상자는 등장인물의 색깔만 보고도 인물을 알아차린다. 오페라도 그렇다. 목소리 높낮이만 들어도 역할을 파악할 수 있다. 보통은 테너와 소프라노처럼 높은 목소리 남녀가 주인공 커플이다. 낮은 목소리는 라이벌 또는 악역.

규칙이 답답해 보인다면, 규칙에서 벗어나 보자.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베이스를, <카르멘>은 메조소프라노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파격’이다. 대중문화 장르도 마찬가지다. 참신한 효과를 노려 익숙한 설정을 뒤집는 일, 이것을 ‘장르 비틀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장르 비틀기를 즐기려면 그 전에 장르 문법을 달달 외워야 한다.

흥미로운 논점이 있다. 흔히들 중국 전통 연극이나 오페라를 즐기는 것을 고상한 취미로 존중하고, 그 문화적 지름길을 익힌 사람을 교양 있다고 칭찬한다. 대중 장르에 대해서는 반대로 말한다. 왜 그럴까? 우리 시대의 장르 어법도 다음 시대의 교양이 되리라는 이야기를 나는 하고 싶다. 동시대 작품을 굳이 얕잡아보는 마음은 어딘지 비뚤어진 것 같다.

그런데 한편, 문화적 지름길은 조심해 다루어야 한다. “해적이라면 낡은 보물지도 조각을 맞추고 때로 칼싸움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방법의 단점은 익숙한 선입견에 기댄다는 점이다. 선입견이 잘못되었을 경우도 있다. 시드 마이어는 진짜 해적이 “탐욕스러운 소시오패스”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진짜 해적은 그렇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괴혈병을 앓았다.”

지나치게 핏대 세우지는 말자. 해적 게임을 즐기다가 정말 해적이 된 사람은 아직 못 보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역사 인식의 경우는 문제다. 세대를 건너뛰어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옛날 라디오 사극 대본을 읽어보았다. ‘구한말의 어수룩한 조상님과 영악한 일본인’이 오래전 장르 문법이었다. 실제 역사는 이보다 복잡했고, 지금은 대중 장르도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 낡은 역사 인식을 21세기 삼일절 기념사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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