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눈의 광인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SNL KOREA>의 디지털 콩트 ‘MZ 오피스’엔 에어팟을 낀 채 근무를 하며 상사, 동료와 소통하지 않고 그저 월급만 ‘루팡’하는 MZ세대 회사원 ‘맑은 눈의 광인’이 등장한다. MZ세대 회사원이었던 나는 그 캐릭터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그를 욕한다면 ‘젊은 꼰대’가 되거나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반대로 그를 옹호한다면 ‘일 못하는 MZ세대’의 표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병원 옥상엔 정원이 있다. 등받이가 있는 벤치도 있고 그네의자도 있다. 그네는 전부 환자가운을 입은 어린이들 것이어서 나는 늘 구석 벤치에 앉아서 땅을 본다. 지난주에 한 할머니 한 분이 링거가 주렁주렁 달린 폴대를 끌고 내 옆에 와서 앉았다. “아휴 여기가(여기서 보이는 풍경이) 원래 산이었는데 지금은 죄다 아파트야. 저기 또 크레인 올라가네.” 나는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할머니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할머니는 달변가였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서로 너무 손해보지 않으려 해서 이혼이 많다는 이야기, 영종도에서 부동산을 해 부자가 된 조카가 이혼으로 재산을 뺏기게 된 이야기, ‘테레비’에 ‘돌싱’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 나는 계속 호응했다. 맞아요, 맞아요. 한 시간쯤 지나 할머니는 “아가씨는 순진해서 남편이 꼭 있어야 될 것 같아”라는 뜻 모를 말을 남기고 가셨다. 며칠 뒤 정원에서 그 할머니를 또 만났는데 내게 했던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들려주고 있었다.

매점에서 데운 호두과자를 샀다. 같은 방을 쓰는 환자들과 함께 나눠 먹으려고 했다. 병실에 가니 옆 침대를 쓰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와 있었다. 호두과자를 나눠주는데 갑자기 그 아주머니가 나를 ‘얼마나 착하고 조용한 학생인지 모른다’고 칭찬했다. 그 아주머니는 처음엔 나를 자기 맘대로 새댁이라 불렀는데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그때부터 학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진료비, 상담을 무뚝뚝하게 하는 의사, 작동이 느린 전동 침대, 옆 병실 환자의 시끄러운 휴대전화 벨소리, 영양제 광고 모델인 한 중년 배우에 대해 욕하다가 내가 준 호두과자가 맛있다고 했고 아주머니는 그 말을 다시 나에게 전달해주었다. 나는 커튼을 쳐서 잠을 자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두 사람이 무안할 것 같아 화장실 가는 척을 하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휴게실을 가니 다리를 다친 남자가 문안을 온 친구들과 함께 과자를 먹고 있었다.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어딜 가도 불편한 건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어 그냥 앉았다. 다리를 다친 남자는 상황을 재연해가며 자신의 싸움 실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남자의 친구들은 남자의 대역이 되기도, 목격자가 되기도 하며 그 영웅담에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소위 ‘싸움꾼 전설’이라는 게 대부분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남자의 친구 중 한 명이 조용히 ‘저분 웃으시는데’ 했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그 후로 그들은 갑자기 말에 거친 욕을 섞어 해괴한 위악을 부렸고 급기야 남자의 싸움 상대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관객이 되어주는 바람에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것 같아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기운이 없어서 벽을 보고 누워 있느라 회진 시간이 된 걸 몰랐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원래 입원이 길면 성격이 어두워지니까 다른 환자들하고 스몰토크를 많이 나누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랑 스몰토크 하다가 오히려 성격이 어두워지는 것 같으면요?’ 하는 말을 삼켰다. 수간호사 선생님이 ‘MZ세대’들은 휴대폰만 보느라 회복이 느리다고 했다. 나는 예 죄송합니다, 하고 아무 음악이 나오지 않는 에어팟을 이어플러그처럼 꼈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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