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세속적 구원과 평범한 소통의 희망](https://img.khan.co.kr/news/2023/03/10/l_2023031001000425000035001.jpg)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윌리엄 골딩 <파리 대왕>, 책장에 꽂힌 고전들을 보자면, 공교롭게도 전쟁의 비극 이후 쓰인 작품이 많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과 죽음, 빈부 격차, 선과 악을 고민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단적 부조리를 마주하자면 사유의 결과물들이 더 깊고 짙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3년여간 전 세계를 괴롭혔던 팬데믹도 그런 듯싶다. 유례없던 규모의 유행병이 정점을 지나고 접하는 영화에서 만나는, 세상에 대한 질문과 묘사가 만만치 않다. 2023년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작들이 그렇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사실 아카데미풍이라는 호명엔 비아냥이 숨어있다. 보편적 인류애, 가족의 사랑, 희생과 같은 그럴듯한 가치로 포장된 기성품이 늘 아카데미에서 환대받으니 말이다. 무릇 아카데미 작품상 하면, 북부 흑인 예술가와 이탈리아 이민자의 우정을 그린 <그린북>이나 청각 장애인 가족 사이에서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는 청인 딸의 휴먼 드라마 <코다>가 떠오른다. 2023년 후보작들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성소수자, 여성 지휘자, 미국 이민자 가족, 고도비만 환자 등등. 그런데 들여다보면, 줄거리 요약조차 지루해보이던 이야기가 인간 본성을 넘어 이중성의 장벽을 일격에 찢고 들어온다. 뜨끔하니 깜짝 놀라 고쳐 앉게 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다.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작으로 거론되는 <타르>(사진)가 그렇다. 주인공 타르는 2023년,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 거의 완벽하다. 성적 정체성을 밝힌 후 가족을 이룬 동성애자이며, 생물학적 여성으로 세계 최고 수준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이성애자-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자리를 차지한 동성애자-여성, 타르는 울타리를 부순 소수자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타르>는 눈물겨운 성공 과정이 아니라 추락의 여정을 좇는다. 3월8일이 세계 여성의날인지도 모르는 여성 타르는, 자신이 가진 지휘자의 권력을 활용해 젊은 신입 단원을 유혹하려 한다. 힘을 가진 타르가 정념을 불태우는 대상은 단지 더 젊은 여성뿐. 오케스트라 내 최고 권력자 타르가 하는 짓은 가부장제의 남성, 마초 권력자, 지휘자의 갑질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온 가족이 한 무대에 등장하는 <더 웨일>은 얼핏 가족주의라는 환상의 복원처럼 보인다. 주인공 찰리는 뒤늦게 성적 정체성을 깨닫고 딸과 아내를 떠났다. 하지만 연인은 세상을 저버렸고, 찰리는 스스로 벌하듯 과식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찰리는 9년 만에 딸에게 연락을 한다. 272㎏에 달하는 고도비만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딸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웨일>이 말하는 화해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찰리가 내디디는 마지막 걸음은 허공을 향해 떠오른다. 빛을 향한 그 걸음은 영원한 구원이자 해방이기도 하다. 272㎏의 거구를 떠오르게 하는 해방은 사실 죽음밖에 없다. 평생을 괴롭힌 욕망으로부터의 해방, 진정한 귀가라는 점에서 말이다. 영원한 안식, 해방, 귀가와 같은 비유는 돌발적인 죽음들이 창궐했던 지난 3년여의 시간이 준 상처에 대한 안타까운 보상처럼 여겨진다.
지루한 일상과 역사에 남길 이름이 대립하는 <이니셰린의 밴시>의 장르는 코미디이다. 당나귀 똥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드는 일상의 세계는 무의미하고 지루해보인다. 그것보다야 음악이나 시 같은 것을 지어서 작가나 예술가로 이름을 남기는 편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생애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하지만 이름을 남기고 싶은데 재능은 없고 욕심만 가득한 바보들은 결국 전쟁을 일으킨다. 이름을 남기는 데 전쟁만 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당나귀 똥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들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건지 알 수 있다. 말을 걸면 손가락을 잘라 문 앞에 던지는 게 코미디인 세상, 그런 무시무시한 세계가 바로 2023년 아카데미 후보작들 사이에 펼쳐져 있다. 영화를 보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세상과 통하는 가장 소박한 의사소통의 방식일 테다. 그 사유와 구원이 무척 세속적일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적 결정으로 이름을 빛내려는 바보 행정가나 정치인들보다야 훨씬 더 윗길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