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화재 진압 힘들고 지하공간은 더 어려워
지하에 집중된 충전시설 설치 지상으로 의견
전기차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도 경계해야
“불가피하게 지하 설치시 수조식 충전소 필요”
제주도 서귀포시 한 주차장에서 지난해 12월15일 전기차 화재가 발생해 소방대원들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다. | 제주도 소방본부 제공
전기자동차가 크게 늘어나고 충전시설(충전기) 설치가 의무화됐지만 충전기 설치 방법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소방청은 ‘지하공간 화재 위험’ 등을 우려하며 충전시설 지상 설치를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 등은 ‘전기차 보급확대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할 문제’라는 의견이다. 전문가와 전기차 업계 의견 수렴 등을 통한 공론화가 시급한 실정이다.
서울 전기차 충전시설 90%는 지하
전국적으로 충전 등 주차 중 화재는 36.7%
12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2022년 12월 말 기준 39만9855대다. 전년도 23만 1000대에 비해 68.4% 크게 증가했다. 전기차 충전기도 20만5205개가 설치됐다. ‘환경친화적 자동차의 개발 및 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친환경자동차법)’ 시행령 개정안이 지난해 1월 시행되면서 전기차 충전시설 의무 대상이 100세대 이상 아파트, 주차대수 50면 이상 공중이용시설 등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전기차 충전기는 대부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설치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 지난해 말까지 설치된 3만3952개의 전기차 충전시설 중 90%가 지하에 있다. 지하주차장 화재 발생 시 진화도 어렵고 자칫 대형 화재로 번질 우려도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소방청이 집계한 최근 3년간(2020~2022년) 전기차 화재 현황을 보면 2020년 11건에서 지난해 44건으로 4배가 늘어나는 등 모두 79건으로 집계됐다. 장소별 화재 건수는 일반·고속·기타 도로가 43건(54.4%)이지만 충전 등을 위해 주차 중에 발생한 화재도 29건(36.7%)에 달한다.
화재 원인으로는 전기·기계·화학적 요인이 24건(30.3%)으로 가장 많다. 이어 부주의(15건), 교통사고(9건) 등의 순이다. 전기차 화재는 진화도 힘들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내부 온도가 순식간에 치솟는 열폭주 현상으로 800도 이상으로 급상승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발생한 전기차 화재에 걸린 시간은 평균 1시간 7분이었다.
연도별 전기차 화재 현황 | 소방청 제공
장소별 전기차 화재 건수 | 소방청 제공
충북도 “법 개정해 충전시설 옥외 설치” 건의
소방청도 “기본입장은 실외충전소 설치”
전기차 화재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는 자구책 차원에서 안전 대책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관련법이 없다 보니 권고안 수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충남도의회는 지난달 21일 본회의에서 ‘충청남도 환경친화적 자동차 전용 주차구역 및 충전시설 등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조례안을 대표 발의한 정병인 의원(천안8·더불어민주당)은 “신규 건축물 건립 시 충전시설을 최대한 지상에 설치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관련 상위법이 없어 이번 조례는 권고안 수준”이라며 “앞으로는 기존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를 지상으로 이전하거나 소방안전시설을 강화할 경우 지원하는 방안도 추가로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테슬라 서비스센터에서 지난 1월 7일 소방대원이 테슬라 차량에 난 불을 끄고 있다. | 서울 성동소방서 제공
전기차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제주에서도 지난달 2일 도소방안전본부가 소방기술심의위원회를 열고 ‘전기차 전용 주차구역 화재안전가이드’ 마련을 위한 심의에 착수했다. 제주도소방본부 관계자는 “소방은 건축물 내 화재 진압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부에서 전기차 충전기 설치 시 소방안전 규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없다 보니 지자체 차원에서 권고안이라도 만드는 중”이라고 말했다. 제주도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차량의 8.03%(3만2936대. 전국 평균 1.5%)가 전기차다.
충북도는 지난 1월31일 안전정책 세미나를 열고 행정안전부와 산업부에 법 개정을 건의했다. 충북도는 건의문에서 현행 친환경자동차법을 개정해 충전시설은 옥외 안전한 장소나 별도의 충전 전용 건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부득이 지하에 설치할 경우 지하 1층 이내에 설치하고 건물 입구 또는 경사로 근처에 배치해야 한다는 규정도 덧붙였다. 김연준 충북도 재난안전실장은 “주차장에서 전기차 화재 빈도는 매년 증가하고 있으나, 충전기 설치 안전기준 등이 관련 법에 마련되어 있지 않아 안전기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방청도 전기차 충전 장소는 지상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내용의 ‘성능위주설계 평가 운영 표준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 가이드라인에서는 지하에 설치할 경우 지표면과 가까운 층에 설치하고 대신 격리 방화벽을 세우고 폐쇄회로(CC)TV로 24시간 감시하도록 했다.
소방청의 가이드라인도 법적 강제력이 없는 권고사항이다. 소방청 관계자는 “소방청의 기본입장은 실외충전소 설치이며, 부득이한 경우 지하에 설치하더라도 방화구역을 정하고 질식방화포를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폐쇄회로(CC)TV 등 소방안전시설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특히 지하 3층 이하에는 설치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내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전기차 충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 서울시 제공
산업부는 전기차 보급 등 고려 ‘신중론’
법개정안 발의됐지만 상임위 계류 중
국민의힘 정찬민 의원(경기 용인시갑)은 지난해 9월 전기차 충전시설 설치 시 소방시설도 포함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친환경자동차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산자위)에 계류된 상태다. 그러나 산업부와 환경부가 이의를 제기했다.
산자위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를 보면 산업부는 “친환경자동차법은 지원법 성격을 지니고 있어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과 ‘전기안전기본법’ 등 분야별 개별법령에서 규정하는 것이 법체계에 부합하다”며 “친환경자동차법에서 소방시설 설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환경부는 “전기차 화재는 일반 소화기로는 진압이 어려워 전문 소방관이 냉각소화 장비를 사용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소방당국 차원의 냉각소화 장비 확충과 전기차 충전시설 화재 대응 지침의 수립 등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산업부는 전기차 충전시설의 지상 설치 의무화 방안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다. 전기차가 법 개정으로 인해 지하주차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식으로 확대하여 해석될 경우 관련 산업 발전에 저해될 수도 있다는 이유다. 산업부 관계자는 “전기차 충전시설을 지하에 금지할 경우 전기차가 아예 지하주차를 못 들어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며 “이럴 경우 전기차 보급 정책과도 연관되고 관련 산업 발전도 저해되기 때문에 종합적인 고려와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기차 충전시설의 소방안전 시설 기준 등은 기술적 요소가 많기 때문에 관련 협회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각종 위원회의 논의를 거쳐야 하는 등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산업부는 대신 전기차 충전시설에 침수대비 안전장치를 부착하고 방진·방수 성능을 국제표준과 동등한 수준으로 보완하는 등 제도개선부터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은평구 서울기록원 주차장에 옥외 전기차 충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 서울시 제공
전기차 화재 위험 내연기관차 보다 낮아
다만 가솔린차 비해 화재 진압 어려워
소방 전문가들은 전기차 화재가 발생하면 진화가 힘들고 특히 지하주차장 화재 시 대형 사고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는 입장이다. 열폭주 현상으로 급격히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배터리의 발화점 이하로 온도를 낮추기 위해 차량 주변에 수조를 설치해 물을 채우는 소화수조까지 동원되는 실정이다.
실제 지난해 12월15일 제주 서귀포시 주차장에서 전기차가 화재가 발생하자 제주도소방안전본부는 이동식 소화수조를 설치한 뒤 배터리 높이까지 물을 채워 화재를 진압하기도 했다. 제주소방본부 관계자는 “차량용 배터리의 화학반응으로 열폭주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수조에 계속 채워 배터리를 식혀서 진화했다”고 말했다. 소화수조까지 설치한 서귀포시 전기차 진화에 걸린 시간은 2시간이 걸렸다.
전기차 화재는 아니지만 2021년 8월 충남 천안시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차량용 LP가스 밸브를 잠그지 않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키는 바람에 발생한 화재로 677대의 차량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제주도 소방본부가 지난해 11월 제주시 한 주차장에서 소화수조에서 전기차 화재를 진압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 제주도 소방본부 제공
윤명오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전기차 충전소는 지상에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우리나라의 도시 구조상 불가피하게 지하에 설치하는 경우도 있을 수 밖에 없다”면서 “특히 지하에 설치할 때에는 수조식 진화가 가능하도록 충전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기차는 배터리 특성 때문에 물이나 일반 소화 약재로는 진화가 힘들고 진화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현재로선 수조식 진화가 현실적 대책이라는 것이다. 또 지하 설치 시에는 소방관들의 진압 활동을 방해하지 않고 주민들의 대피로 등이 확보되도록 하는 기준 마련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기업들이 배터리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다른 셀로 확산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개발은 물론 충전 시에 배터리만을 교체하는 방안 등도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화재보험협회 방재시험연구원의 최명영 박사는 지난 1월 충북도 주최 세미나에서 전기차는 가솔린차보다 화재가 덜 발생한다고 밝혔다. 2020년 소방청 통계를 보면 자동차 1만 대당 화재 발생률이 내연기관차는 1.88%이고 전기차는 1.63%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재진압의 관점에서는 전기차가 더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테슬라 리포트는 화재 진압 시간의 경우 전기차가 가솔린차 대비 8배 정도 오래 걸린다는 발표도 있었다.
전기차 보급이 한국보다 훨씬 많은 중국의 경우 2020~2022년 중국 전기차 화재 원인 중 27.5%가 배터리 충전 중이었고 주차 중이 38.5%인 것으로 나타나 전기차 충전시 화재에 대한 대비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최 박사는 “화재 시 전기차 화재진압이 내연기관 대비 매우 어려워 해외 일부 지역에서는 전기차의 지하주차장 사용 금지 또는 사용금지를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내 여건을 감안하면 충전시설 지하 설치를 배제하기 어려움이 있지만 화재진압이 어려운 지하에서 전기차가 화재가 발생할 경우 피해가 매우 클 수 있으므로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충북소방본부가 지난해 11월 24일 오창미래지농촌테마공원 주차장에서 전기차 화재 진압을 위해 질식소화포를 덮는 실험을 하고 있다. | 충북도소방본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