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잘한다는 것은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와 챗GPT의 대담집
최대한 ‘의도한 대로’ 답변 유도한 듯한 질문들에 고개 갸웃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불확실한 세계에 나를 열어두고
다른 이와 ‘함께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순간 아닐까
‘모른다’는 말 하지 않는 챗GPT
모든 질문에 정답 있을 거란 착각 줄 뿐
‘좋은 질문’ 하는 법 배우긴 어려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책이 있는데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와 챗GPT의 ‘대담’집 <챗GPT에게 묻는 인류의 미래>입니다. 저자인 김 교수는 지난달 27일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는 질문을 제대로 하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챗GPT에 단순한 질문을 집어넣으면 훌륭한 답이 안 나오고, 신경 쓴 질문을 해야 쓸 만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고개를 여러번 갸웃하게 되었습니다. 왠지 모를 의아함은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의문의 정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대체로 책 속 대화의 흐름은 일방적으로 한쪽은 묻고 한쪽은 답하는 구조였으며, 그 질문도 최대한 ‘내가 의도한 대로’ 답변을 받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사실 챗GPT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엔 오래전부터 ‘질문’의 이슈가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질문 없는 사회’라는 문제였습니다. 교실에는 질문이 실종되었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질문’이라는 키워드가 이슈가 된 이번 기회에, “질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이유로 질문을 하는가?” “질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등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오늘 레터에선 <판을 바꾸는 질문들> <이그노런스> 등을 지팡이 삼아 ‘질문’에 대해 해찰해보았습니다.
■질문을 던질 때#1 : “이의 있음!”
우리는 어떤 경우에 질문을 던질까요? CNN 기자 출신의 인터뷰 진행자, ‘질문 전문가’인 프랭크 세스노는 <판을 바꾸는 질문들Ask more>에서 질문의 유형을 무려 11가지나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 유형들을 상황에 따라 세 가지 정도로 큼직하게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이의 있음!” 유형입니다. 이런 질문은 상황이 뭔가 이상하거나 어색할 때, 잘못된 것이 보이거나 껄끄럽고, 왜 이렇지? 하는 궁금증이 들 때 제기됩니다. 한 방향으로 쌩쌩 달리는 열차에서 아무도 방향을 의식하지 않을 때, 때론 이를 멈춰세우거나 방향을 바꾸게 할 수도 있는 힘을 지니고 있죠. 이 때문에 이런 유형의 질문은 이 책의 제목처럼 ‘판을 바꾸는 질문’이라고 불립니다. 이런 질문은 통상 굉장히 껄끄럽고 부담이 됩니다. 반대 의견이 인정되지 않고,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한낱 권력 없는 개인이 이런 질문을 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실제로 이 책엔 워싱턴포스트의 ‘북한통’ 기자 애나 파이필드가 북한에서 가는 데마다 질문을 퍼붓다가 면박당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북한 측 관계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죠. “질문이 너무 많습니다. 데리고 다니기가 좀 힘든 분이군요.”
프랭크 세스노는 만약 이처럼 질문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면, 모두가 잘못된 방향을 향해도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아 참사가 날 수 있다고 짚습니다. 한 예로 미국의 이라크전을 들 수 있을 텐데요. 9·11 테러 이후 미국 내 강경파들의 득세로 2차 이라크전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후세인에겐 살상무기가 없었습니다. 세스노는 미국의 2차 이라크전 관련 ‘오판’의 가장 큰 원인으로 “콜린 파월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껄끄러운 질문을 충분히 던지지 않은 까닭”이라고 짚고 있습니다.
‘이의 있음!’이란 질문은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합니다. 또한 ‘이의 있소’라고 외치는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선 과연 이런 건강한 질문들이 잘 던져지고, 또 잘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그리고 챗GPT에 ‘질문을 잘하기’가 이런 질문과 관련이 있을까요?
■질문을 던질 때#2 : 더듬는 질문
두번째는 “더듬는 질문”입니다. 주로 교실, 연구실 등에서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지평을 조금씩 더듬어 넓혀가는 질문이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흥미진진한 모험의 과정에서 질문은 필수입니다. 하지만 짐작하시겠지만, 씁쓸하게도 첫째 유형의 질문에 이어 둘째 유형의 질문 역시 한국 사회에선 좀처럼 자유롭게 오가지 않습니다.
신지영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질문 없는 교실’에 대한 인상적인 칼럼(“발언이 안전한 대학 강의실 만들기”)을 썼는데요. 그는 질문이 없는 한국 교실에 답답함을 느껴 유학을 다녀왔지만, 여전히 질문이 없는 한국 교실에 씁쓸함을 느낍니다. 칼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에피소드는 신 교수가 대학원 수업에서 발표 학생에게 질문을 하자 그 학생이 울어버린 사건이었는데요. 한국의 교실은 이 학생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장이고 무지는 부끄러운 것일 뿐이며, 질문은 상대의 무지에 대한 공격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요?
‘무지의 과학자’인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은 <이그노런스>에서 ‘답’이 아닌 ‘질문’이, ‘지식’이 아닌 ‘무지’가 과학을 이끌어왔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왜냐면 좋은 질문은 우리가 파내고 궁리할 새로운 지점을 열어젖혀주기 때문이죠. 우리는 흔히 질문을 ‘미완결’ 혹은 ‘정답을 얹기 위한 받침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낯선 세계를 탐구해야 하는 과학에선 낯선 세계의 가능성을 타당하게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질문이야말로 핵심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파이어스타인은 말합니다. “질문은 대답보다 더 거대하다. 좋은 질문 하나가 여러 층위의 대답들을 끌어낼 수 있고, 수십년간 해결책을 찾도록 자극할 수 있고, 완전히 새로운 탐구 분야를 만들고, 철옹성 같은 사고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대답은 과정을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무지와 질문은 긴밀하게 엮입니다. 겸손하게 최대한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어디서 어떻게 뛸 것인가를 면밀하게 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과학이라는 것이죠.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지난해 7월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좁은 범위를 완벽하게 실수 없이 풀어내는 능력은 훌륭하지만, 넓고 깊이 공부할 준비는 비교적 덜 돼 있다”고요. 저는 어쩌면 ‘질문’을 던지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냅니다. 무지를 기반으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을 탐구해가는 것이 아닌, 자신이 이미 대부분의 지식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절한 명령어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입력하는 방식의, 그렇게 해서 명확한 답을 이끌어내는 ‘질문’은 파이어스타인이 말하는 ‘질문을 만들기 위한 질문’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을 던질 때#3 : 교류하는 질문
이어지는 세 번째는 ‘교류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엔 인터뷰, 대담 등이 해당하는데요.
인지언어학자 김성우와 사회학자 엄기호가 공동저술한 대담집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두 사람의 연구자가 제목의 질문을 비롯해 리터러시와 관련된 다양한 질문들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 질문과 응답을 주고받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엄기호는 ‘유튜브의 시대에 과연 책은 끝장이 나는 걸까?’ ‘리터러시가 부족하다며 손가락질당하는 아이들보다도,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정작 더 큰 문제 아닐까?’ 같은 고민을 골똘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혼자’ 하지 않고, 김성우와 질문을 두고 교류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엄기호는 어쩌면 리터러시의 본질이란 ‘한 사람의 완벽한 의사소통 능력’이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대담에서) 홀로 주체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응답하는 것”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며, 이어 대담이란 “내가 당신의 말로부터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돌려주기 위해 고민하고 그것으로 응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책을 오랜만에 빨려들어가듯 다시 읽고서 덮으며 곰곰 생각했습니다. “이 두 연구자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둘이 한쪽은 질문만, 한쪽은 대답만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 질문자인 동시에 응답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 같은 질문을 공유하고 있지만, 서로 살아온 삶의 궤적에 따라 의외의 재미난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내가 챗GPT 대담에 거부감을 느꼈던 이유는 인간 질문자가 챗GPT라는 ‘대화 상대’에 대해 애초부터 진심으로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것은 겉보기엔 대담처럼 보이지만 대담이 전혀 아니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가 어떤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정말로 원하는 것은 어쩌면 어떠한 해찰의 여지도 없애는 ‘말끔한 정석 답’보다도, 이런 울퉁불퉁하고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좋은 대담집을 읽어놓고서는 마지막에 떠올린 것이 느낌표보다도 물음표 쪽이 더 많습니다만, 어쩌면 좋은 대담이라는 이유로 그렇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맺음말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질문은 대화와 소통의 핵심적 요소”라며 “물음표는 질문을 통해서 듣는 사람의 참여와 대화를 적극적으로 요청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불확실한’ 세계를 향해 나를 열어두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까만 상자 안에서 나 혼자 오도카니 앉아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의 고민, 욕망, 의문, 호기심에 대하여 (텍스트든 사람이든) ‘함께’ 생각해보기를 권하는 순간이 바로 ‘질문하기’ 아닐까요? 질문이 제기되는 순간 현실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쐐기가 박힙니다. 그 틈 사이로 우리는 즐겁게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저도 인스피아에서 대체로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만 이 과정에 ‘해찰’이라는 시시한 단어를 붙인 이유는 꼭 ‘해답’을 찾으려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내 마음속에 간절한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 안에서 해찰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한편 챗GPT에게는 어떤 질문을 하든 3초 안에 답이 ‘뚝딱’ 나옵니다. 챗GPT는 모른다는 말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은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 그리고 그것을 ‘내가 하기 나름으로’ 반드시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주지 않을까요? 그리고 답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질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곧바로 받는 기계의 등장이, 그리고 그 기계에게 나의 의도에 최대한 부합하도록 효율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에 대한 궁리가 과연 서두에 말했던 ‘질문 없는 사회’의 해답을 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제가 ‘챗GPT와의 대담집’을 읽으며 이번 기회에 새로 떠올리게 된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연구자님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레터를 썼습니다.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