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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 전쟁의 희생자들

입력 2023.03.23 03:00

백수(白壽)를 앞두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병원에서의 암 치료를 중단하고 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평생 도덕적 신념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는 데 노력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카터는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업적 때문이 아니다. 퇴임 이후 펼친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활동, 국제 분쟁 해결, 공중보건 개선과 경제·사회적 개발 촉진 등의 공로가 수상 이유다. 역대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는 그이지만 재임기간(1977~1981년)의 정치는 미국 유권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다. 그를 좌절시킨 결정적 계기는 인플레이션이다.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김준기 뉴스콘텐츠부문장

1970년대 미국은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 린든 존슨 행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대대적 재정지출에 나서고 베트남전쟁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으면서 물가 상승이 본격화됐다. 그럼에도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물가 안정 조치에 소극적이었고,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강타하면서 인플레이션율은 1979년 두 자리 숫자(13.3%)까지 치솟았다. 물가 급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카터는 측근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불리는 폴 볼커를 연준 의장으로 지명했다. 볼커는 취임하자마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무자비하게 올렸다. 기준금리가 1980년 6월 20%까지 치솟았다. 요즘 한국의 대부업체에서나 나오는 법정 최고금리 수준이다.

최대 희생자는 늘 가난한 사람들

오일쇼크에 볼커쇼크까지 겹친 미국 경제는 급속히 침체됐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10%대를 기록하며 노동자 수백만명이 일자리와 집을 잃고 희생양이 되었다. 해외에서도 희생자들이 나왔다. 미국 자본을 대거 유치했던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금리 상승으로 외채가 부풀려지고, 세계적 경기 침체로 주력 상품인 원자재 수출도 위축되면서 외채상환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해야 했다. 중남미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이다. 볼커의 초고금리 정책은 많은 희생자들의 고통을 밟고 결국 효과를 봤다. 카터를 이기고 미국의 새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은 1983년 인플레이션에 대한 승리를 선언했다.

지금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인플레이션의 원인도 1970년대 상황과 오버랩된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저물가, 저성장이 지속되면서 세계 주요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엄청난 돈을 풀어 경기부양을 시도했다. 인플레이션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여기에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기업과 소상공인, 국민 개개인에게 지원된 막대한 보조금이 불쏘시개가 되면서 2021년 중반부터 물가가 뛰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의 결정타가 오일쇼크에 따른 공급 충격이었다면 이번에는 지난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 역할을 했다.

최대 희생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이고, 지금 한국에서는 세계 최대 수준의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서민들이다. 서민들은 급등하는 물가로 인한 생계비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한국은행이 올려놓은 금리로 인한 이자비용 증가라는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1%대로 추락하고 기업들은 비용 절감 등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하고 있어 서민들의 고용 증대와 소득 증가는 난망하다. 실제 올해 들어서도 3월까지 수출 감소세와 무역수지 적자가 이어지며 한국 경제는 성장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월까지 취업자 수 증가폭이 9개월 연속 둔화되는 등 고용 사정도 악화되고 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유탄을 맞은 실리콘밸리은행(SVB)이나 크레디트스위스(CS) 등 미국과 유럽 일부 은행의 위기가 금융시스템 전체로 번진다면 한국 경제가 받을 충격은 배가될 것이다.

경기와 금리인상 사이 딜레마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취약계층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정책을 통해 고용과 소득 측면에서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것이 절실하지만 재정건전성을 추구하는 현 정부 정책 기조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은도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더 악화될 것 같고, 경기 회복을 위해 금리 인상을 자제하면 물가가 자극될 것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계절은 봄으로 가고 있지만 한국 경제와 서민들 앞에는 차가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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