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귀엽다. 이 고양이는 추상적인 고양이다. 따끈하고 털이 많고 눈이 동그란 것. 그런데 누군가의 삶에서 종종 고양이는 대체 불가능한 고양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앗, 저 사람 얽혀버렸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고양이로부터 한 발 뒷걸음질쳤다.
인간은 자신과 동물이 완벽히 다르다는 관념, 실제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취급되는 구조 속에 살아간다. 동물은 일방의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니 인간이 모든 것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다. 동물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결은 유사하다. “키울 자격이 안 되면 데려오지나 말든지.”
어린 고양이는 너무 활발하다. 성묘는 습관이 너무 굳어졌다. 아픈 고양이는 힘이 든다. 고양이 키우기는 시간도 돈도 공간도 많이 든다. 고양이는 빨리 죽는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알면서 겁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하얗고 털이 긴 고양이가 올 뻔했다. 4인 1실 기숙사, 고시원, 볕이 안 드는 원룸을 전전하다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한 무렵이었다. 고양이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올 게 왔구나. 그러다 훨씬 돈도 많고 집도 넓은 사람이 나타나, 조금 아쉬워하고 많이 안도하며 고양이를 보내줬다.
지금은 여름이라는 고양이랑 산다. 내가 어쩌다? 여름이는 먼지가 많은 창고에서 태어났고, 병원도 없는 곳에서 아팠다. 의무병이었던 막냇동생은 앞발이 곪아 두 배는 부어 있는 작은 고양이를 죽게 둘 수가 없어서, 숙소에 데려다 분유를 먹이고 붕대를 감아주고 항생제를 계량해 먹여가며 돌봤다. 그다음 내보낼 수가 없으니까 그냥 같이 살았다. 부스러기처럼 보이던 고양이는 음식을 가리지만 대체로 무던한, 어엿한 청소년 고양이가 되었다. 아팠던 흔적은 하루에 한두 번씩 상처가 있던 곳을 빠는 버릇으로만 남아 있다.
여름이는 동생의 주거지가 잠깐 뜨는 바람에 우리 집에 왔다. 모르겠지만 일단은 잘하려고 해봤다. 그러다 나만 잘하려 한다고 다 잘되는 게 아니란 것도 알게 됐다. 고양이가 내 경계를 밀고 들어오면 내가 다시 밀어도 보며, 우리는 춤을 추듯 일상의 궤도를 함께 그려나간다. 알고 있다. 대비하지 않고, 대비하지 못한 여러 종류의 절망과 슬픔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걸. 그러거나 말거나 삶은 이어진다.
최근엔 ‘평가자’가 정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문 없이 달려가고, 그 과정에서 우연에 마주하는 것을 모두 질색하게 되는 사회 문제에 대해 써왔다. ‘1인분’을 못하면 다 버리고 간다. 그런데 누가 계산한 1인분인가? 최근 언급된 ‘저출산’ 대책의 계산법은 이렇다. ‘애 셋을 낳으면 군대를 면제해 주겠다’ = ‘애 때문에 버리는 시간을 채워 주겠다’, ‘2억을 주겠다’ = ‘애 때문에 버리는 돈을 메워 주겠다’. 이게 틀린 걸 그들 빼고 누가 모를까?
여기는 작고 약하고 아픈 것을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사람들이 그들과 같이 쉽게 비참해지고, 이들을 아무도 돕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런 처지를 피하고 싶어 한다. 이 본능적인 느낌을 좀 더 자세히 말해야 한다. “삶은 여행”(이상은)이고, “길을 잃기 위해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좋아서하는밴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