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씨(32)는 오는 5월 임대차계약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에게 “이사를 가겠다”고 통보했다. 갱신청구권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집주인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보증금을 내 줄 여력이 없으니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 받아가라”는 말이었다. A씨가 2년 전 인천 미추홀구 한 빌라(전용면적 59㎡)에 입주하면서 낸 보증금은 2억2900만원이었다. A씨는 “역세권 준신축인데다 당시만 해도 전세 시세가 이 정도였기 때문에 집값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해당 빌라는 현재 실거래가가 1억1500만원까지 내려간 상태다. 현 시세대로라면 집을 경매에 넘겨도 전세보증금을 절반도 돌려받지 못한다. A씨가 낸 보증금 수준으로 새 세입자를 구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가 지난 25일 공동주택 평균 공시가격을 전년 대비 평균 18.61% 크게 낮추면서 2년전 한참 집값이 상승할때 입주했던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자금력이 없는 집주인의 경우 새 세입자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받아 구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내주는데, 해당주택 공시지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새 세입자로부터 보증금을 받아도 현 세입자에게 보증금 전액을 주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집을 경매로 넘기거나 집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평범한 서민들이 현업을 이어가면서 소송전을 벌인다는 것 역시 현실적으로 힘들다.A씨가 살고 있는 인천(-24.04%)은 세종(-30.68%) 다음으로 공시가격이 가장 크게 하락했다.
정부가 전세사기 방지 대책으로 오는 5월부터 HUG(주택도시보증공사)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 기준을 전세가율 100%에서 90%로 조정하고, 주택 가격 산정 기준을 공시가격의 150%에서 140%로 낮춘 것도 기존 세입자들에게는 악재다. ‘공시가격의 126%(140%×90%)’까지만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하게 돼 전세보증금이 추가로 축소되는 결과가 됐기 때문이다.
‘빌라왕’사건 이후 세입자들은 대부분 HUG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한다. 집주인이 문제가 생겼을 때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HUG에 가입할 수 있는 반환보증보험 규모가 사실상 전세보증금이 되고 있다.
예컨대 A씨가 거주하고 있는 빌라의 올해 공시가격은 1억500만원으로, 지금은 HUG 보증보험으로 전세보증금 1억5450만원을 보장받지만 앞으로는 1억3230원까지만 보장받을 수 있다.
세입자, ‘집값<전세보증금’에 돈 떼일 위기
A씨는 “‘전세사기’문제 때문에 요즘에는 HUG보증보험 가입이 안 되면 아예 입주를 안 한다는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할 수 있겠나”라면서 “10년 넘게 전세로 옮겨다니며 살고 있지만 세들어 살 집의 공시가격이 얼마인지까지 알아봐야한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정부는 그러나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보도자료를 통해 “최근 전세가격이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하고, 전세가율이 100%를 초과하는 주택비중을 제외하면 보증가입이 어려운 주택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특히 최근 임차인 우위시장 환경이 조성되고 있으며, 전세가율이 90%를 초과하더라도 임차인이 보증부 월세 등을 선택함으로써 보증가입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설명과 달리 공시가격 하락으로 집값 급상승기에 ‘갭투자’를 통해 집을 마련한 ‘갭투기 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분쟁은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28일 대법원 등기정보광장 부동산 등기 신청현황을 살펴보면 지난 달 집합건물(아파트·빌라 등)에 대해 임차권등기명령이 신청된 부동산은 전국 3094건으로, 지난해 2월(704건) 대비 4배 이상 증가했다. 이 중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이 전체 임차권등기명령의 79.5%(2460건)를 차지했다.
특히 ‘전세사기’가 다수 발생하고 있는 인천의 지난달 임차권등기명령 신청건수는 803건으로 전년 동기(121건) 대비 7배 가까이 증가했다. 임차권등기명령 제도는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사를 나가야 하는 세입자를 구제하기 위한 장치다. 임차권 등기명령을 받아 등기가 이뤄지면 세입자는 이사를 가더라도 보증금을 우선 돌려받을 수 있다.
박원갑 KB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집값이 급락하면 세입자도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을 떼일 위험에 처한다. 즉 하락기에는 깡통전세와 깡통주택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갭투자로 집을 산 집주인 입장에서는 새로운 전세 세입자를 통한 ‘빚 돌려막기’가 어려워져 역전세난이 더 심해지고, 결국 집주인과 세입자의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심형석 미국 SWCU 부동산학과 교수(우대빵부동산연구소 소장)는 “집값이 하락하면 전세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아파트에 비해 연립·다가구주택 등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피해는 고스란히 세입자에게 가게 되는데 현실적으로 최선책은 결국 재계약시 보증금을 낮추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