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민중과 대인의 정치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의 첫 토요일에 국방부 앞에 가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지를 위한 집회에 참여했다. 훈련을 위해 미국의 막강한 군사 자산이 한반도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컨트롤타워가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무기가 쌓일수록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북한과 극한 대립하는 미국은 백성들끼리 총기로 매일 내전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 전범국 독일도 통일되었는데 80년 가까운 남북분단이 지속되는 것은 한반도가 강대국들이 설치한 이해관계의 사슬에 꽁꽁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삶의 문제에 자신의 주체적인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솟았다.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원익선 교무·원광대 평화연구소

집회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서울시청 광장까지 행진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분향소에 국화꽃을 올리며 묵념했다. 액자 속 얼굴들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며 눈물이 흘렀다. 부모와 친구들은 얼마나 비통해할까. 슬픔이 분노의 강이 된 참담함을 위정자들은 이해할까.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한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를 보고 손을 잡았다. 뭐라도 말을 건네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명횡사한 자식을 가슴에 묻은 고통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될까. 광장 동쪽에서는 ‘대일 굴욕외교 규탄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재명·이정미 등 야당대표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대중들 틈에 섞인 나는 예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집회와는 공기가 전혀 다름을 느꼈다.

그것은 본질적 분노였다. 가진 것 없어도 자기반성 없는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백성들의 자존심을 뭉개버렸다는 배신감, 견고하게 구축해온 사회질서가 정의의 사도를 자청한 법기술자들의 탐욕으로 무너지는 충격에 의한 좌절감, 자본 권력에 포획된 정부가 기업의 이윤창출을 위해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할 노동자들을 기계처럼 대하는 야만성에 대한 분개의 마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분노는 인간 실존의 존엄성을 비꼬며 부정하는 악에 대한 직선적인 감정이자 횡행하는 부조리·불의를 모두 불태워버리겠다는 화염이었다.

전무후무한 무혈혁명에 성공한 대중들 자신이 새 권력을 창출하고 있고 있었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말하듯 광기를 발하며 성장을 원하는 군중의 열기가 바로 적을 파괴하는 거대 에너지임을 느꼈다. 자율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다. 민주주의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야욕의 정치가들이 선거공학으로 민중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잡아 자신들의 욕구 분출을 가능케 하는 이 체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독선과 독주에 항거하는 백성들이 광장으로 나오는 현실이 증거다.

대통령퇴진 촛불행동이 진행되는 장소로 갔다. 정치가들에게 속은 대중들의 분노의 함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그 소리는 대인의 정치가를 구하는 민중의 갈망이었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의 주변 강대국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하며, 정의와 평화의 길로 안내하는 대인의 지도자는 없는가. 분단과 대결의 무모함을 북한과 함께 단칼로 베어낼 수 있는 결단의 정치가는 없는가. <찬도그야 우파니샤드>(임근동 옮김)에서처럼 “그가 바로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포용적인 위정자는 없는가.

깨달음의 책인 <무문관(無門關)> 제1칙은 조주구자(趙州狗子)라는 공안이다. 한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조주선사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경전에선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 무슨 말인가.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자의 분별 의식을 타파한 것이다. 분별하는 마음은 선택하게 되고 집착에 빠진다. 집착은 파당과 대결을 낳는다. 만물과 하나 된 무념의 경지에서 대자비가 샘솟는 대도를 성취한 대인은 삿된 마음을 바루는 정의의 활인검을 쓴다. 성현들은, 의로움을 추구하는 대인에게는 이로움도 따라오지만, 이로움만 추구하는 소인은 의로움은커녕 이로움도 잃게 된다고 한다.

권좌에 앉은 소인배의 정치가들은 백성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주권자인 백성들을 비분강개토록 하고 국록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안으로는 민심을 분열시키고, 밖으로는 국격을 실추하고도 그 자리에 있다면 백성을 모독한 것이다. 민중의 한이 서린 ‘잔인한 4월’, 피눈물로 세운 민주주의와 평화를 짓밟는 자는 무덤 속 의사와 지사들도 부활하여 용서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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