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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차를 좋아하나요

“혹시…. 할머니 손에 자라셨나요?” 질병 회복 모임에서 만난 K씨가 나에게 질문했다. 사람들이 ‘부모님이 섭취를 제한한 음식’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왜 남의 가정사를 물으시냐고 하니 K씨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저만의 통계일지 모르지만, 우리 세대에서 식습관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더라고요. 저도 해당되는 이야기고.” 젠장. 맞는 말이었다. 할머니의 원칙은 ‘굶지 않고, 거르지 않고, 남기지 않는다’가 전부였다. 끼니를 거르지만 않으면 라면을 먹어도 괜찮고, 며칠 지난 우유를 먹어도 상관없었다. 명절날 땅에 떨어진 떡을 주워 먹다가 숙모들이 소리를 지르면 할머니는 ‘괜찮다. 먹고 안 죽는다’고 했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그런 우리 할머니도 절대 못 먹게 했던 단 하나의 음식 바로 콜라와 사이다였다. 학교에서 운동회를 한 뒤 받은 작은 캔 콜라 하나를 냉장고에 넣어두면 할머니는 내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콜라를 숨기거나 버렸다. 내가 콜라가 사라졌다고 울면 할머니는 대신 그릇에 찬 물을 받아 매실 진액 한 스푼을 태워 내주셨다. 햄버거, 피자, 핫도그…. ‘정크푸드’라 불리는 음식들을 전부 그냥 먹게 두셨으면서도 왜 콜라와 사이다만은 그렇게 못 먹게 하셨는지…. 모든 것이 허용되는 세상에 오직 하나만이 금기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10대인 주인공이 그것에 도전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소년만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그 만화의 결말은 창대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독립한 뒤 곧바로 탄산음료라는 금기에 도전했으나 그들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콜라 서비스’가 기본인 배달 음식의 세상은 나를 더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이 꽉 막힐 때에도, 잔뜩 폭식을 했을 때에도, 가볍게 끼니를 때웠을 때에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거나, 슬퍼서 눈물이 흐를 때에도…. 나는 사이다를 찾았다. ‘칙-’하며 부글거리는 탄산의 기포 소리만 들어도 소화가 되는 것 같았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따갑고 달콤한 탄산의 자극이 없으면 식사가 끝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이다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사이다에 중독되어버렸다.

지난겨울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결말을 보고 화를 냈다. 주인공 윤현우가 자신을 죽게 만든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회귀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고 성공적인 복수를 하다가 최종화에서 돌연 회귀 전의 삶으로 돌아가 자신의 과오들을 참회했기 때문이다.

이번 봄에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며 화를 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나는 주인공 동은이 더 지독하고 악랄하게 복수하기를 바랐다. 동은이 복수를 하면서 조금도 괴롭지 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기를 바랐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모범택시> 시리즈를 볼 때도 같은 마음이다. ‘왜 저렇게밖에 못하는 건데? 그냥 죽여!’ 억울한 범죄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적 복수를 하는 무지개 재단 일당이 너무 곧고 바른 사람인 것이 화가 난다. 어느덧 중독이 깊어져 탄산이 두 배 강한 사이다를 찾는 것처럼 나는 한국 드라마가 당연히 내려야 하는 윤리적인 선택과 결정들 앞에서 더 큰 쾌감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 자괴감의 고백이 소위 ‘사이다 서사’에 대한 폄하나, 복수의 윤리를 갖췄다고 해서 그 작품의 완성도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나쁜 놈은 천벌을 받을 거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때, 노력한 만큼 결실이 돌아온다는 얘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 사람들은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같은 복수를 원한다. 그리고 창작물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면서도 결국 사람들이 그 짜릿함에 더 깊게 중독되지 않도록 만들 의무가 있다. 탄산처럼 톡톡 튀지 않아도, 먹으면 속이 내려가는 시원한 매실차 같은 이야기를 향해.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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