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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개편이라는 코미디

입력 2023.04.10 03:00

근자에 있었던 노동시간 개편을 둘러싼 혼란은 윤석열 정부의 문제를 압축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찬찬히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6일 노동시간 개편안을 입법예고했다. 이 개편안이 ‘주 최대 69시간’ 노동을 허용한다는 비판이 나오자 윤 대통령은 16일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했다. ‘주 최대 60시간’을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20일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개인적 생각에서 말씀한 것이지 가이드라인을 주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캡(상한)을 씌우는 게 적절하지 않으면 윤 대통령이 굳이 고집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윤 대통령이 21일 국무회의에서 “주당 60시간 이상의 근무는 건강 보호 차원에서 무리라고 하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실 참모가 대통령의 지시를 ‘개인적 생각’이라고 깎아내리는 것도, 대통령이 다시 ‘내 생각은 변함없다’고 말하는 것도 처음 본다. 외관만 보면 대통령과 참모가 정책을 놓고 공개적으로 노선투쟁이라도 벌이는 것 같다.

이 정부가 노동시간 개편을 놓고 혼선을 빚은 건 처음이 아니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6월23일 주 52시간제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연장 노동시간의 관리 단위를 주 단위에서 월 단위로 바꾸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튿날 출근길문답에서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 “보고받지 못했다”고 했다.

정부가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은 애초에 설정한 정책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일할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쉴 때 집중적으로 쉬자’는 것이지만, ‘일이 몰릴 때는 주 52시간 제약 없이 일하자’는 게 정책의 속뜻이라는 걸 모두 안다. 한국은 노동시간이 많기로 악명 높은데, 거기에 더해 일이 몰리는 주에 더 일하게 하자고 하니 외신들도 놀라서 쳐다본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 52시간 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며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이 말이 정부가 노동시간 개편을 추진하는 데 방향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윤 대통령은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 한다. 노동시간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인식이 교정된 셈인데, 문제는 대통령실과 노동부는 여전히 ‘대선 후보 윤석열’의 발언을 지침으로 여기는 것 같다는 점이다. ‘대선 후보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의 갈등이랄까.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게 대통령실 참모들과 노동부 관료들의 속내일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억울해할 것도 없다.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는 윤 대통령도 매한가지일 테니까.

정책 추진 과정도 문제투성이였다. 노동시간 개편은 충분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함에도 노동계와 진지하게 대화하지 않았다. 노동 현장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도 않았다. 이른바 MZ세대와 기성 노조를 갈라치는 소재로 활용하려다 도리어 정부가 고립되는 촌극을 빚었다. 대통령실, 노동부, 여당 간 정책 조율 기능은 실종됐다.

노동시간 개편만 그럴까. 민감한 외교 사안일수록 자국 내부 협상이 중요하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일제 강제동원(징용) 배상 문제 해법으로 ‘3자 변제안’을 일방적으로 제시했을 뿐 피해자 측과 사전에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설익은 정책을 불쑥 꺼내놓았다가 여론이 안 좋으면 폐기하는 일도 습관처럼 반복된다. 이런 한건주의식 행태는 의견 수렴, 대화와 소통, 이견과 갈등의 조정, 다시 말해 사람들이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작동하지 않는데 뭔가 가시적인 성과는 내고픈 조급증이 발동할 때 나타난다.

윤 대통령은 요즘 ‘결단’을 자주 한다. 그러나 ‘결단’은 이것저것 다 시도해본 사람이 마지막에 내리는 고독한 실존적 행위이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쉽게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은 ‘안 되면 말고’식 무책임일 따름이다. 이렇게 기본이 안 된 정책, 국정운영이 성공할 리 만무하다. 기후위기와 산업 전환, 저출생·고령화, 국민연금 개혁, 지역균형발전, 교육개혁처럼 긴 안목과 고도의 정치력을 요하는 이슈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반정치적 대통령에게 정치가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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