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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저녁에

입력 2023.04.10 03:00

얼마 전 읍에 사는 군의원이 찾아와 “산골에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하고 물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 크게 불편한 건 없어요. 다만 마을마다 혼자 사는 어르신이 갈수록 늘어나 걱정이에요. 10년 뒤엔 산골 마을이 어떻게 변할까요? 생각만 해도 안타깝고 쓸쓸해요.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잖아요. 제가 이 마을에 뿌리내릴 때만 해도 팔팔하던 60대 어르신들이, 지금은 모두 80대가 됐거든요.”

서정홍 농부 시인

서정홍 농부 시인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군의원은 오히려 내가 더 걱정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산골 마을에 살지 말고 읍으로 나와서 살아요. 편리하게 아파트에 살면서 자동차로 출퇴근하듯이 농사지으면 되잖아요. 읍 인구가 늘어나면 복지시설이 늘어나고 의료시설도 좋아지고요. 그렇게 되면 농촌도 살 만하지 않겠어요? 농촌 인구도 늘어나고요.” “군의원님, 산골 마을에 있는 집은 다 어떻게 하지요? 농사야 출퇴근하듯이 짓는다 해도 살 집은 있어야 하잖아요. 아파트를 빌린다 해도 우선 돈이 있어야 하고요?”

군의원을 돌려보내고 씁쓸한 마음을 안고 산밭으로 갔다. 오랜만에 흠뻑 내린 봄비로 여기저기 감자 싹이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삼월 중순에 씨를 뿌린 대파, 상추, 케일, 쑥갓, 시금치 싹도 파릇파릇 올라왔다.

나는 날마다 보고 또 봐도 신비하고 감동스러운 연둣빛 새싹 앞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하루하루 시시때때로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농사를 자동차 타고 출퇴근하듯이 지을 수 있을까?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더구나 날마다 왔다갔다 자동차 매연을 뿜어대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게 올바른 일일까? 산골엔 편리함이나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게 하늘에 별만큼이나 많은데…. 그 가운데 한 가지만 들어보자.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가끔 서로 다투기도 하고 몰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다 들키기도 한다. 가까운 지역에 있는 몇몇 중·고등학교에서는 그럴 때마다 학생총회(식구총회)를 열어 스스로 정한 규칙(약속)을 어긴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토론하고 결정을 한다. 학생들은 그 결정에 따라 내가 사는 산골에 와서 4~5일이나 또는 7~8일 남짓 먹고 자면서 농사를 짓기도 한다. 농부들과 어울려 감자를 캐고 감잣국을 끓이거나 감자전을 부치고, 똥거름 나르다 지치면 맨발로 산책을 하거나 눈을 감고 개울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듣기도 한다. 비지땀 흘려 일하고 밥을 먹는 학생들은 그릇에 붙은 참깨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봄날샘, 농사일하고부터는 참깨 한 알이 예사로 안 보여요. 내 몸 같아요.” “날마다 일하러 가는 엄마 아빠와 이웃들이 너무 소중하게 보여요.” “함께 일하고 함께 사니까 사는 맛이 나요.” 이런 깨달음도 스스로 얻는다. 그런데 농부들이 읍에 나가 아파트에 살면 학생들과 어찌 이런 체험을 같이할 수 있으랴.

아무리 똑똑하고 재산이 많은 부모나 훌륭한 교사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자연(농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작은 마을이 살아야 아이들이 살고 나라가 살지 않겠는가. 돈과 편리함으로 비틀거리는 시대지만, 자연이 살아 있으면 길은 있을 것이다. 정치든, 교육이든, 우리네 삶이든 정답은 없지만 길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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