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해방 전선의 전사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자신과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막다른 벽에 도달한 사람들

그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서

진심으로 사회변혁을 꿈꾼다

그것은 장애인의 독립운동이다

<전사들의 노래>(오월의 봄). 최근 출간된 홍은전 작가의 책이다. 지금도 장애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는 ‘전사들’인 박길연, 박김영희, 박명애, 이규식, 박경석, 노금호의 이야기를 담았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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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모르겠다. 지하조직의 세계는 모르겠지만 30년 전 대학가에서 이 말이 짧게 유행한 적 있다. 운동하던 학생들이 입던 셔츠들 중에 ‘전사’나 ‘전선’ 같은 문구를 새긴 것들이 꽤 있었다. 당시는 운동이 몰락하던 때였다. 현실의 운동은 몰락하는데 운동가요들에는 “피비린 전사의 길” “복수의 총탄”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같은 문구들이 넘쳐났다. 액면가는 엄청난데도 작은 물건 하나 살 수 없는 지폐 같은 말들. ‘전사’도 그런 말들 중 하나였다.

이제 열사, 전사, 해방, 혁명 같은 말들을 공공연하게 내건 운동들은 사라졌다. 이런 말들을 쓰려면 운동가 자신이 사회를 통째로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망상가라는 놀림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운동가들이다. <전사들의 노래>에 등장하는 장애운동가들은 진심으로 사회변혁을 꿈꾼다. 책 제목이 과장이 아니다. 다만 이들은 지난날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들이 사회변혁에 뛰어든 것은 이를테면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이들은 장애인 한 명이 마음 편하게 출근길 버스를 타려면 사회의 기본 이념과 체제를 몽땅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른 사람들이다.

이들 장애해방전사의 모습은 지난날 떠올리던 전사의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시설에서 나오고 싶다는 장애인 소식을 들으면 바스티유를 습격한 혁명가들처럼 휠체어를 타고 시설로 쳐들어가는 박길연. 그는 어린 아들이 침대 매트리스와 난간에 끼여 울고 있는데도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함께 울던 엄마였다.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던 때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공동대표였던 박김영희. 그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낮달 같은 존재였죠. 떠 있는데 아무도 내가 거기 떠 있는지 몰라요.”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공동대표인 박명애.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살던 시절에 마라톤 중계를 제일 좋아했어요. 선수들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게 좋아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였고 현재 지하철 탑승 시위를 이끌고 있는 그는 하반신이 마비되고 5년 동안 집에 처박혀 있었을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는 삶이 무감각했죠.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으니까 고통이라도 느껴보려고 칼로 허벅지를 긁거나 담배로 팔뚝을 지져서 항상 퉁퉁 부어 있었지요. 자도 자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죠.”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세상의 변혁에 뛰어든 것이다. 침대에 누워 울고만 있던 사람, 낮달처럼 떠 있던 사람, 바깥 풍경을 보기 위해 마라톤 중계를 끝까지 보던 사람. 자도 자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던 사람. “좀 우아한 방식으로 하면 안 되냐고 하지만 버스를 못 탄다는 말을, 지하철을 못 탄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우아할까요”(박김영희), “경찰과 싸우다가 팔이 꺾인 적이 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관절이 꺾이면 다시 돌아오질 못해요. 오른쪽 손목이 그때 굳어서 굽혀지지 않아요”(박길연), “서울에 투쟁하러 올 때면 며칠 전부터 물도 적게 먹고 밥도 적게 먹습니다”(박명애). 화장실 이용이 어렵기 때문에 투쟁에 적합한 몸을 만드는 것이다.

‘버스를 타기 위한 사회변혁’이라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들의 이력은 식민지 시기 독립투사를 닮았다. 중도장애인이 된 뒤 16년을 집에만 있었다고 하는 사람(박길연), “평생 집에서만 지내다 마흔 일곱에 야학을 만나 세상에 눈을 뜨고 쉰셋에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다”는 사람(박명애), 몇 년씩 시설을 들락거리다가 야학을 만나고 이동권연대 투쟁국장이 되었던 사람(이규식),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보고 싶다”는 사람(노금호). 이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벽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기록자인 홍은전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방법을 다 쓴 사람이 결국 도착하는 곳”에 이른 사람들이다. 여기가 어디냐고? 우리 사회의 기본 이념인 비장애중심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최중증장애인들이 전사가 되고, 발달장애인들이 알아듣기 힘든 노래를 부르며 이상한 춤을 추는 곳. 이곳은 장애해방전선이다. “이것은 장애인들의 독립운동, 해방운동이에요”(박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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