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고, 매일이 억울함과 분노의 시간이었습니다.”
‘56년 만의 미투’ 사건 당사자 최말자씨(77)는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씨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물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몰려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 씨가 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56년 만의 미투,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일동’ 주최 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1967년 당시 18살이던 최 씨는 자신을 강간하려는 가해자에 저항하다 상해를 입혔다는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받은 바가 있다. 이준헌 기자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 단체와 시민 70여명은 즉각 재심을 개시해 성폭력 피해 여성의 방어권을 인정할 것을 대법원에 촉구했다.
1964년 만 18세였던 최씨는 자신을 강간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혀 최씨를 무죄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검찰은 ‘고의로 멀쩡한 남자의 혀를 잘랐다’며 최씨를 중상해죄로 6개월 넘게 구속수사하고 재판에 넘겼다. 최씨를 성폭행하려던 노모씨(당시 21세)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는데, 최씨는 그보다 무거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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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간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최씨는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8년 쌓인 응어리를 풀고자 용기를 냈다. 자신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받기 위해 2020년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부산지방법원·부산고등법원은 최씨의 재심 청구와 항고를 기각했다. ‘본 사건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최씨의 변호인단이 2021년 9월 재항고장을 제출한 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대법원 역시 아직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최원진 한국여성민우회 사무국장은 “당시 국가와 사회는 피해자가 성폭력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오로지 가해자 상해 정도에 집중하며 가해자 행위를 범죄가 아닌 가십처럼 다뤘다”면서 “대법원은 60여년 전 판결이 이 사회와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야 한다. 신고되지 못한 사건, 처벌받지 않은 가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라”고 말했다.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인 최말자 씨가 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56년 만의 미투,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일동’ 주최 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이준헌기자
김현선 목포여성의전화 대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당시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하게 된 성폭력 상황”이라며 “잘못된 판결은 언제라도 바로 잡는 것이 정의이자 대법원의 의무”라고 했다.
오는 6일이면 최씨가 성폭력을 당한 지 59년, 재심을 청구한 지 3년이 된다. 여든을 앞둔 최씨는 이날 “지금이라도 바로잡지 못하면 이런 일이 되풀이될 것이고 성폭력 피해 여성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구시대적인 법 기준을 바꿔야만 더 이상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기자회견 직후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5월 한 달간 같은 장소에서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릴레이 시위가 이어질 예정이다. 이날 오후 2시30분 기준 시민 4546명이 재심 촉구 서명에 동참했다.
▼ 김송이 기자 songyi@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