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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을 읽으며

입력 2023.05.04 03:00

2010년대 중반 출판 담당 기자로 일했다. 매주 신문사에 도착하는 수많은 책들 중 토요일자 ‘책과 삶’ 지면에 들어갈 만한 책을 고르고 북리뷰를 작성했다.

백승찬 문화부장

백승찬 문화부장

책의 종류는 다양하다. 한국 종합일간지의 책 지면은 전통적으로 인문·사회 서적을 선호하지만, 매번 같은 분야의 책만 다룰 수는 없기에 경제학, 심리학, 과학 책도 종종 지면에 올렸다.

그때 의식적으로 자주 눈길을 두었던 건 과학책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지혜가 현대에도 통용되는 인문학과 달리, 과학의 교양 수준은 10년이 멀다 하고 업그레이드돼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신간 과학책을 읽다가 학창 시절 교과서로 배웠던 과학 지식은 이미 무용한 것으로 판명난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도 많았다.

<이기적 유전자>와 <코스모스>가 너무 오랫동안 양분했던 과학 스테디셀러 목록은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국내 출판계에서도 좋은 과학책이 잇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까지도 이어진다. 이번주 ‘책과 삶’ 회의에서도 묵직하면서도 촘촘한 과학책이 다수 눈에 띄었다.

최근에 읽은 과학책 두 권도 훌륭했다. <이토록 굉장한 세계>(에드 용 지음·어크로스)는 동물의 감각기관에 대한 책이다. 세상은 무한하지만 동물의 감각은 유한하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저마다의 ‘감각 거품’에 둘러싸여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감각할 따름이다. 난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의 노트북 컴퓨터를 보고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뭉클한 의자의 쿠션을 느낀다. 이 감각이 이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해 이 공간의 모든 것을 장악한다고 자부한다. 틀렸다. 모기가 있다면 내 숨결의 이산화탄소를 감지할 것이고, 울새가 날아든다면 지구 자기장을 알아챌 것이다. 제아무리 탁월한 시각·청각·후각을 가진 인간이라도, 세상을 이해하는 매우 작은 통로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위대한 동시에 미물인 인간

<미래의 자연사>(롭 던 지음·까치)는 진화법칙 같은 생물법칙들이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할지 설명한다. 도로의 중앙분리대, 하수구, 아파트 화단같이 다른 환경과 분리된 곳이 그 자체로 새로운 진화의 터전이 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어떤 종이 포식자나 기생충, 천적을 피할 때 이득을 얻는다”는 ‘탈출법칙’은 너무나 상식적인데, 이 같은 상식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인간 및 각종 동식물의 이동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좋은 과학책을 읽으면 두 가지 생각이 종종 떠오른다. 이 생각들은 서로 모순된다. 우선 ‘인간은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복잡미묘한 우주의 법칙을 밝혀내 명확한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생명체는 지구에선 인간뿐이다. 순간의 직관이나 짐작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증명하기 위해 때로 평생에 걸친 실험을 수행한다. 심지어 이 실험이 실패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또 다른 과학자가 나타나 실험을 이어간다. 한때 진리로 증명됐다 하더라도 새로운 실험에 의해 반박된다면, 과학계는 옛 진리에 머물지 않고 주저 없이 새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과학의 위대함이다.

또 다른 생각은 ‘인간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인데, 호모 사피엔스는 20만년 전에 출현했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환산하면 호모 사피엔스의 시간은 3초에 불과하다. 인간이 기후위기를 자초해 지구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주장도 오만이다. 기후위기로 위험해지는 건 인간과 그 주변의 일부 생명체일 뿐이다. 핵전쟁으로 인류 문명이 파괴되거나 기후위기로 생태계가 크게 변한다 해도 일부 미생물은 더욱 번창할 수 있다. 지금도 화산 분화구나 심해 같은 극한 환경에서 오히려 번성하는 미생물이 있다.

좋은 과학책 읽으면 겸허해져

과학책을 읽으면 겸허해진다. 지난 며칠간 나를 사로잡았던 고민이 순식간에 가벼워진다. 고민을 회피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커져가는 고민에 압도됐던 나 자신의 상황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위대한 동시에 미물이고, 그렇기에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때로 좋은 과학책은 예기치 않게 경전 혹은 자기계발서 역할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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