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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예술가일 필요는 없다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꼭 예술가일 필요는 없다

영화 <파벨만스(Fabelmans)>(사진)의 제목을 보자마자, 우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의 ‘페이블 맨(Fable Man)’을 연상했다. ‘파벨’은 다양한 언어권에서 플롯이나 이야기, 담화 등을 뜻한다. 그 조어를 파고들자면 아마도 말을 재미있게 지어내는 이야기꾼과 닿을 법하다. 세계적인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파벨만스>를 플롯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게 엉뚱한 일은 아니란 의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영화라는 매체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경이와 매혹으로 묘사되곤 한다. <시네마 천국>의 소년이 신부의 통제 아래 영화를 보는 장면이나 다이 시지에의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에 등장하는 영화 상영 순간들이 그렇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통해 영화가 운명이었음을 강조한다. 성공한 유명 감독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하는 건 그럴 만하다. 그런데 보리스 삼촌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예술가의 비극을 예고하는 부분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예술이 하늘의 왕관과 땅의 월계관을 줄 테지. 하나 네 가슴을 찢어 놓고 널 외롭게 할 게다. 넌 네 가족들의 수치가 되고, 사막으로 추방당한 집시가 될 게다”라며 보리스 삼촌은 신화적 예언을 한다. 의아함을 준 건 바로 ‘예술’이라는 단어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대중에게 사랑받은 건 의심할 바 없지만 과연 예술가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젠, 예술과 아닌 것의 경계라는 게 무의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예술 영화라는 호명은 어떤 차별성을 부여한다. 박찬욱 감독이나 다르덴 형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두고 예술 영화라 부르는 데엔 저항감이 없다. 하지만 <인디아나 존스> <죠스> <쥬라기 공원>을 예술 영화라 부르는 건 주저된다.

오손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이 중요한 영화사적 작품이 된 데엔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이라 부르는 프랑스 비평가들의 역할이 컸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예술성을 가진 영화를 골라 작가주의 영화라 불렀고, 그런 감독들을 작가로 구분했다. 예술성과 상업성, 대중성과 작가성 사이의 구분이 점차 무의미해지는 맥락에 비평의 쇠락이 앞서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비평가의 시선이 예술을 가리긴 하지만 그 의미 부여가 더 이상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현학적 엘리티즘이라 비난받기가 더 쉽다.

그렇다면, 대중에게 외면받는 작품들은 중요도나 영향력이 없는 것일까? 영화는 태생부터 대중에서 비롯되었다.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대량 복제가 가능하기에 엘리트 계층의 소유나 독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마크 저커버그가 보는 영화와 내가 보는 영화 사이에 원작과 모작의 위계가 불가능하다.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을 보고 즐기는 영화는, 그래서 민주적이며 대중적인 예술 매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작품은 훨씬 더 예술적으로 다가오고 어떤 것은 상업적이며 선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대형 상업 영화를 의미하는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탄생하게 한 사람이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이다. 그러고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흥행의 성과는 오히려 쉽게 얻어진 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반면, 예술이란 그가 가졌던 상업적 성과에 비해 늘 부족하게 채워졌던, 갈증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인종차별이나 가족의 불화가 드러낼 만한 보편적 상처였다면 정작 예술가로서의 고단한 자기 증명이야말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진짜 상처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좀 바꿔 보자. 영화가 예술이어야만 가치 있는 것일까? 우리를 웃게, 울게, 놀라게, 무섭게 해서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 아닐까? 영화는 재미있기만 해도, 그러니까 예술이 아니라 해도 충분하다. 괜찮다. 소년 새미를 매혹했던 열차 충돌 장면처럼, 긴장감 넘치는 프랜차이즈 장르 영화가 관객에게 더 깊은 위안을 전해줄 때도 있다.

모든 영화가 오락이기만 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예술 영화만 가득하다고 영화계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예술 영화가 주는 영혼의 견인도 의미 있지만 오락 영화의 격려도 필요하다. 어쩌면 우린 스티븐 스필버그를 통해 그렇게 달콤한 휴식과 오락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예술이란 추상 명사나 예술가의 비극적 상처에 결핍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든 감독이 예술가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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