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출범 1년, 월급쟁이 1년

이호준 경제부 차장

아파트 단지 앞 꼬마김밥 가게가 문을 닫았다. ‘오픈 기념 5개 2500원’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손님들을 끌어모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불이 꺼진 채 ‘임대’라는 안내가 문 앞에 내걸려 있었다. 가게 앞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나도 한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한 게 겨울이었으니 반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은 셈이다. 물어보니 오픈 행사가 끝나자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했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이호준 경제부 차장

정부세종청사가 있는 세종시에는 노포가 없다. 애초에 청사 이전을 따라 상가 건물들도 신축된 터라 가게들이 오래되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던 가게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기 때문이다.

사실 떠밀리듯 동네 자영업자가 된 이들의 노하우란 별 볼 일 없어서, 임대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가게들에서 간판도 주인도 바뀌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하지만 월급쟁이의 지갑은 요즘 특히나 더 별 볼 일 없어서 아무 가게나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물가는 무섭게 올랐는데 월급은 빤하니 엄두가 나질 않는 탓이다.

물가 상승을 감안한 실질소득은 반년째 감소했다. 지난해와 똑같이 벌었어도 쌀이든 옷이든 실제로 살 수 있는 구매력이 뒷걸음질친 것으로, 1년 전보다 우리 대부분이 더 가난해졌다는 얘기다.

실질소득 계산에 반영됐다는 5%, 6% 같은 물가 상승률조차도, 현실에 대입하면 너무 작아 와닿지도 않는다. 장을 보러 나가면 2500원이던 오이는 2900원, 1만원 하던 과일 한 봉지는 1만3000원이 찍혀 있는 영수증을 받아드는 게 현실이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의 난방비 칸에는 여태껏 한번도 보지 못한 숫자가 적혀 있고, 은행의 대출금리 인상 고지를 받고 나면 이달부턴 뭘 더 줄여야 하나 한숨부터 나온다.

힘든 고개 넘어가려 모두 아등바등

점심 한 끼에 1만원을 가볍게 넘겨버리는 이른바 ‘런치플레이션’(점심+인플레이션)을 실감하지 못하는 직장인이 요즘 얼마나 될까. 편의점 도시락이 최고의 직장인 아이템이 되고, 불황의 대명사인 대형마트 자체브랜드(PB) 상품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지출 내역을 단체대화방에 공개하고 불특정 다수에 꾸지람을 받아 절약 의지에 불을 지핀다는, 이른바 MZ세대의 ‘거지방’은 또 어떤가.

지난해 본업 외에 부업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은 2003년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많았다. 투잡을 희망하는 40대 이상 중장년 구직자가 1년 전보다 200% 넘게 증가하고, 투잡의 대명사인 배달원은 지난해 하반기 남성 직업 순위 6위로 뛰어올랐다.

또 고령자 절반이 ‘일을 하고 싶다’고 답했는데, 일을 하고 싶은 이유는 ‘생활비에 보탬이 되고 싶어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청년도 중년도 노년도 나름의 방식으로 힘든 고개를 넘어가려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는 셈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요즘 정부 부처와 기관들에서 성과를 홍보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간 어떤 일이 있었고, 정부가 무엇을 했는지 빼곡하다.

윤석열 정부 출범을 전후해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곡물, 원유, 운송 등 국제시장에서 가격이 오르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었고, 미국의 긴축 여파로 환율과 금융시장 불안이라는 유탄도 감내해야 했다. 초라한 무역실적 이면에는 역대급 반도체 경기 후퇴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부 기자로 출범 후 1년을 지켜본 윤석열 정부는 이런 악조건들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그럼에도 만만치 않은 1년을 보낸 월급쟁이의 일원으로 ‘지난 1년간의 성과’로 시작되는 평가를 읽다보면 괜히 심술이 난다. 물론 국정홍보 점수로 평가받는 공무원 사회에서 “부족했네” 따위의 현실 인식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 눈치 볼 위가 없는 대통령쯤이나 돼야 가능한 얘기다.

대통령, 위안 대신 비판·엄포 가득

마침 윤 대통령이 취임 1년의 소회를 밝힐 수 있는 자리가 얼마 전에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통령의 발언에는 기대했던 겸손이나 위안이 없었다. 대신 비판과 엄포만 가득했다.

‘지난 1년 힘드셨죠. 노력했지만 부족했습니다.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같은 메시지를 내보낼 수는 없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생활고를 견뎌내고 있는 서민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 윤석열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예로부터 공직자의 대표적인 덕목으로 왜 ‘겸양’을 꼽았는지 ‘문뜩’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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