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전시장에 갔다. 벽에 걸린 사진들은 낡고 조악했다. 자신이 흉내내는 옛 수묵의 준법(皴法)과 대결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사진을 구성하는 기술적 이해는 얄팍했다. 프레임에 새어 들어오는 빛과 흐릿하게 퍼진 입자를 다루는 능력은 부족했다. 전시장 곳곳에 인쇄되어 놓인 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허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망연한 마음이 되어 전시장 바깥으로 나왔다. 오래전, 나의 스승은 비평을 쓰기 위해서는 사진 한 장을 20분 이상 대면해야 한다고 나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 사진들 앞에서는 5분도 버텨내기 쉽지 않았다. 나는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며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사실은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대한 긴 글을 쓰기 위해 전시장에 들렀던 참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제다. 작가에게 윤리적 흠결이 있다면 작품 역시 비윤리적이고 무가치한가? 혹은 작가의 인품이 고결하다면 작품 역시 가산점을 받는가? 물론 이 질문은 낡고 오래되었고, 답은 어느 정도 합의되어 있다. 작가의 인격이 작품의 윤리적 가치를 보증한다면, 우리 비평가들은 작품의 복잡한 의미와 악전고투하는 대신 작가의 사생활을 추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라 해도 작품이 지닌 의미를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니다. 즉 작품에 대한 윤리적 가치 판단의 문제는 충분히 섬세해야 한다.
하지만 굳이 이 질문에 대해 다시 답하려 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은 가해자들이 돌아오는 계절이다. 몇 년 전, 담대하고 용감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미투 운동을 전개했다. 그 고발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곳의 운동장이 이렇게 엉망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도, 갤러리의 반짝이는 쇼윈도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도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성 예술가들의 용기는 내게 이곳의 구조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가해자들은 슬그머니 다시 돌아오고 있다. 한때 자신의 오롯한 삶과 치열한 고민을 작품에 대한 가산점으로 넙죽 받아먹던 자들이 같은 입으로 작품과 작가의 사생활을 분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남는 장사를 한다. 하지만 남는 장사가 과연 예술일 수 있는가. 뻔한 문제라도 지나치게 자주 제기된다면, 그 뿌리를 다시 파헤쳐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써오면서, 깊게 파내려가기 위해서는 존경할 만한 적과 대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오고 말았다.
모든 가해자들을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안쓰러워서는 아니다. 굳이 예술가 같은 걸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성실한 사회인으로서 노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자의 안전이다.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온전한 거짓말쟁이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충분히 사과하고 반성한 후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피해자도 조금쯤 더 안전할 수 있지는 않을까.
자, 우리 중년 남성들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토론하도록 하자. 아무래도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에 자신을 이입하는 데 익숙한, 안온한 삶을 사는 나는 기꺼이 당신들의 적이 되겠다. 돌아오기를 원한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우선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할 테고, 그들이 가해자를 보더라도 딱히 위협을 느끼지 않아야 할 테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은 여전히 논의가 필요하다. 얼마나 자숙해야 할까? 사과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싸운 뒤에는 그 결과물을 놓고 그 용감한 여성 예술가들의 판단과 평가를 겸손하게 기다려도 좋겠다. 그들의 용기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여전히 세상을 모호하고 흐릿하게 바라보고 있을 테니, 기꺼이 고개를 숙여서 배움을 청할 생각이다. 당신들 역시 그러하기를 바란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