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1일 제사 주재자로 ‘최근친 연장자’를 우선해야 한다는 새 기준을 제시한 바탕에는 기존 판례가 유교적 가부장제에 뿌리를 둔 제사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판단이 있다. 가족제도와 제사의 의미가 달라진 시대 변화를 고려하면 ‘장남’을 우선토록 한 기존 판례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차별 폐지와 성평등에 한 발짝 더 나아간 판결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이날 “어떤 가족제도가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에 반한다면 헌법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며 “전통이란 역사성과 시대성을 띤 개념으로서 현대적 의미로 포착해야 한다. (기존 판례는) 현대적 의미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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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평등에 반하는 ‘장남 우선’ 판례···“장남이 더 정당한 이유 없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유족 간 협의가 안 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장남·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제사 주재자로 우선한다’는 2008년 대법원 전합 판례는 헌법이 정한 남녀평등 이념에 조화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제사 주재자를 정할 때 여성 상속인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별 때문에 남성 상속인에 비해 후순위가 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제사의 의미가 변하면서 조상에 대한 추모나 부양에서 아들과 딸의 역할 차이가 없다는 점도 짚었다. “제사에서 부계혈족인 남성 중심의 가계 계승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하고, 망인에 대한 경애와 추모의 의미가 보다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례 방법이 변하고 제사 형식과 절차가 간소화되는 상황을 비춰보면 장남이 제사 주재자로 더 정당하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전통과 관습에서 남녀평등 이념과의 조화를 지향해 온 대법원 판결 흐름에 비춰보면, 적장자 중심의 제사 계승원칙 사상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2008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계속 고수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여성도 종중 구성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례를 내놓는 등 그동안 대법원은 성차별적 관습에 묶이지 않고 가부장제의 벽을 허무는 판결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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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장남의 제사 주재권’ 파기한 대법, 차별 없어지는 전기로
새 기준은 ‘연장자’…“부계중심 가계계승 잔재에 불과” 별개의견 비판도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장남 제사 주재자 지위 인정 여부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대법원은 기존 판례를 폐기한 자리에 새 기준으로 ‘나이’를 제시했다. “같은 지위와 조건에 있는 사람들 사이 연장자를 우선하는 것은 현행 법질서 및 사회 일반의 보편적 법인식에 부합한다”는 이유다. 실제 장례를 지낼 때도 연장자가 상주를 맡는 데다, 가족 안에서 어떤 법적 지위를 부여할 때 연장자를 우선하는 기준이 법질서 곳곳에 반영돼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민유숙·김선수·노정희·이흥구 대법관은 판례 변경에는 찬성하면서도 “최근친 연장자를 제사 주재자로 우선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망인의 의사를 비롯해 동거·부양·왕래·소통 등 측면에서 망인이 생전에 유족과 형성한 관계는 어땠는지, 유체·유해에 대한 유족의 관리 의지와 능력 등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누가 제사를 주재하기에 가장 적합한지 개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대법관은 “다수의견은 종래 남성 위주던 제사주재자 결정 방법이 헌법상 평등원칙과 조화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경하면서, 전통과의 조화를 명목으로 연장자 기준에 따르는 것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장자가 우선해야 한다는 인식 역시 부계혈족 중심의 가계 계승 잔재에 불과하다”며 “망인에 대한 추모 감정에 있어 직계비속 중 연장자가 더 강하다고 단정하기 어려우므로, 제사 주재자로 연장자가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남녀·적서 불문이라는데…배우자는?
나아가 배우자를 제사 주재자를 정할 때 우선순위에서 배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견해도 별개의견에서 다뤄졌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공무원연금법 등 다수 법률에서 권리를 부여할 때 유족 중 배우자를 최선순위로 정하고 있으며, 핵가족 중심의 가족 형태에선 제사를 반드시 다음 대에서 맡아야 한다는 의식도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장남 제사 주재자 지위 인정 여부 등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다
이들 대법관은 “생존 배우자는 망인과 촌수, 생전 생활 관계 등을 비춰 망인에 대한 추모 감정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을 것으로 경험칙상 추단할 수 있다”며 “전통적 효 사상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녀가 생존 배우자 의사에 반해 망인의 유체·유해 처리 방법을 임의로 정한다는 것은 사회통념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별개의견에 대한 보충의견도 나왔다. 김선수 대법관은 이 사건을 두고 “망인의 유골은 그 양이 아니라 망인과의 관계를 이어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중요하다”며 원고와 피고가 망인의 유해를 나눠 갖고 망인을 추모해 원만하게 해결하길 바란다는 취지로 의견을 냈다.
제사 누가 지내나 ‘정실 맏아들→장남→맏이’···대법 판례 변천사
‘제사는 누가 주재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법원의 답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적장자’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사망한 부모의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은 ‘정실이 낳은 장남’에게 있었다.
하지만 2008년부턴 맏이가 아닌 아들이나 딸도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기존 판례를 파기하고 ‘망인의 재산을 물려받는 공동상속인들끼리 협의해 제사 주재자를 우선 정하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면서다.
당시 전원합의체는 판결문에서 적서 간 차별이 사라지고 남아선호사상이 쇠퇴하는 등 시대상이 변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상속인들간의 협의와 무관하게 적장자가 우선적으로 제사를 승계해야 한다는 종래의 관습은 상속인들의 자율적인 의사를 무시하고 적서 간 차별을 두어 개인의 존엄과 평등을 기초로 한 변화된 가족제도에 원칙적으로 부합하지 않게 되었다”면서 “공동상속인들 간 협의로 제사 주재자가 정해져야 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협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였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협의가 안 될 경우 ‘적서를 불문하고 망인의 장남이나 장손에게 제사 주재권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상속인 중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봤다. 즉 혼외자(서자)인지와 상관없이 ‘아들 먼저’, 그 다음에 ‘나이순’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모든 대법관이 이러한 기준이 합당하다고 본 것은 아니다. 일부 대법관은 공동상속인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다수결로 제사 주재자를 정하거나 법원이 개별 사건에서 당사자들의 주장을 듣고 심리해 정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김영란 대법관은 보충의견에서 “다수의견이 지도적 원리로 삼고 있는 장자 우선의 원칙은 현대 사회에서 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성별 및 연령을 기준으로 공동상속인들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이라며 “사회생활 및 제도의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지난해 하급심에선 대법원 판례를 뒤집은 결정이 나왔다. 서울서부지법 민사21부(재판장 임정엽)는 지난해 8월 장남이 모친의 시신을 인도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장남 측 청구를 기각하고 차남에게 시신을 인도하라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제사가 가계계승보다는 망인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더 강해지고, 법 질서가 호주제 폐지나 형제자매의 동등한 상속분 인정 등 가족관계 내에서 개인의 의사와 가치가 존중되고 양성평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돼 왔다”면서 “이를 감안하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상속인들 간 협의가 안 될 때 장남 등이 당연히 제사 주재사가 된다는 인식이 널리 용인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1일 한 발 더 나아가 상속인 간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직계비속 중 가장 맏이’를 제사 주재사로 우선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재사 주재 우선권을 적장자에서 장남으로 변경한 기존 판례는 15년 만에 또 바뀌었다.
▼ 김희진 기자 hjin@khan.kr · 김혜리 기자 harry@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