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전화하는 법이 거의 없으신 분이 늦은 밤에 연락을 하셨다. 구순을 넘긴 분의 호출인지라 불안했지만 맘을 다잡고 전화기를 들었다. 다행히 목소리는 건재하셨고 내용은 의외였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 흔한 대화는 아니었다. 하신 말씀은 미래세대에 어떤 해악을 미칠지 모르는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순진한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이 일본 정부의 흐름에 말려들지 않도록 언론이 이 사안의 실체를 알리고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마땅한데 당신이 보기에 미진하여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어조와 결론은 끝까지 이성적이셨다. 정부와 언론과 사회 성원들이 끈질기게 대화해 이 사안의 심대한 위험성을 알리고 설득해야 한다고 하셨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1930년대에 태어나 칼을 찬 일본인 선생이 학생을 감시하던 식민지 시절에 국민학교를 다니셨고, 종전이 몇년 늦어졌더라면 소위 일본 제국의 나이 어린 군인으로 징병되었을지도 모를 분의 이야기였기에 가볍게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후 일본과 사업을 하면서 접한 목적 있는 환대의 경험까지 곁들여지니 아무리 한 개인의 경험에 의한 진단일지라도 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집단적인 폭력을 가하고, 긴밀한 정치경제적 고리를 형성해 온 한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사고 후 방사능 오염수 방류라는 사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 사안이 가지는 질적인 다름과 이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말이다.
때로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때로는 근대적 법질서라는 것으로 물질적 정신적 수탈을 했던 상대방이지만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자며 손을 내밀며 다가올 수 있다. 이때 무조건 뒤로 물러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 피해의 경험은 우리 공동체에 각인되어 아직도 아프지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며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하는데 이를 마냥 거부할 수도 없다. 두 나라 지도자가 함께 원폭 피해자를 추모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일관성은 있으면 좋겠다. ‘평화’를 함께 만든다고 하는데 협력할 상대방은 헌법을 개정하고 자위대를 증강해 전쟁 가능한 국가를 만들겠다고 한다. 미래세대가 보는 교과서에서 폭력과 전쟁 동원, 수탈의 기록을 지운다. 평화를 말하면서 세계 각지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는 데에는 외교력을 총동원한다. 원폭 피해자를 추모하면서 누가 얼마나 끌려가서 피해를 입었는지는 정확히 가늠하지 않는다.
‘미래’를 함께 만든다고 하는데 오염수 방류는 강행하겠다고 한다. 미래세대일수록 몸에 누적되는 피해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방사능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 해양 생태계에 미칠 영향 등은 논란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식은 제한적이고 방류 전에 예상되는 피해의 모든 측면을 밝히고 입증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이쯤에서 마음속에서 포기를 한 것 같다. 과학이 동원돼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면, 이 사안이 열개쯤 되는 뉴스꼭지 중 그저 하나로 다뤄진다면, 우리 생각의 길이가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것만큼만 짧게 지속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와 생명에 관한 이 문제를, 다른 일들처럼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날 밤 통화의 메시지였다. 근대적 지배체제를 이식하고, 채찍과 당근을 동원해 대중을 신민으로 길들이는 데 능한 이들을 오랜 세월 겪으며, 의도를 읽고 조종당하지 않아야 하며 성실하게 설득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미래세대를 거론하며 노동·교육·연금개혁을 기획하면서도 정작 미래를 위협하는 오염수 방류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대화하고 설득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불안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마침 서너 살 된 아이가 나뭇잎을 쓰다듬고 뛰어간다. 아버지가 젊은이의 목소리로 변화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하게 만든 것이 무엇일지 문득 떠오른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성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