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둘러보면, 돈 버는 데 뛰어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은 꼭 있다. 안정된 직업에 주식 대박, 그리고 부동산 투자까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한 성공 신화 중 하나다. 1804년 한양에 살았던 홍응경도 그랬다. 그는 국가 제사를 관장했던 봉상시 소속 숙수(조리사)였다. 요즘과 같은 ‘셰프’의 인기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 평민들과 비교할 때 매우 안정된 자리였다. 게다가 그는 지역에서 올라온 관원들에게 집을 세주어 꽤 짭짤한 수입도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근래에 충청도 수영(수군 군영)의 경주인(京主人) 자리까지 꿰찼다. 수군절도사 윤이동이 800냥 주고 산 경주인 자리를 그가 매년 쌀 20섬을 내는 조건으로 받아온 것이다. 정말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출전: 노상추, <노상추일기>)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경주인, 혹은 경저리(京邸吏)로도 불리는 이 직책은 지방 관청에서 한양에 배치한 일종의 연락 담당자였다. 이들이 근무하던 곳을 경저(京邸) 혹은 경재소(京在所)라고 불렀다. 지방 관아 입장에서 경주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조정에서 해당 지역 지방관이 낙점되면 그 사실을 지역으로 알려 부임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해야 했다. 누군가는 지역에 부과된 부역을 조정하고 주선하는 일도 해야 하며, 지방에서 차출해서 중앙으로 올려 보낸 관노들을 관리하는 역할도 필요했다. 시일을 맞추지 못하는 공물이나 진상품을 누군가는 우선 대납해야 하고, 지방민들의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할 사람도 필요했다. 중앙 집권 국가에서 지역과 중앙을 연결하는 고리는 지역과 중앙 모두에게 중요했다.
초기 경주인들은 주로 지역에서 파견된 아전이나 향리들이었다. 그런데 경재소 업무 특성상 경주인들과 지방관이 공모하면, 비리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동법 실시 이전에는, 공물을 대납하고 여기에 엄청난 이익을 붙여 지역에 부과했다. 지역민 입장에서는 이들 역시 일종의 방납 업자였던 셈이다. 또한 관노들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직접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노비의 도망 등으로 인해 발생한 모자란 노동력을 대납하고 그 비용을 이자까지 쳐서 지역에 부담시켰다. 이처럼 지역에서 파견한 경주인들이 수령과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르자, 세종에서 중종 연간에는 아예 한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돈 주고 고용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더 큰 비리 조건을 만들었다. 경주인 역할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역과 상관없이 한양에 사는 사람들을 고용하도록 하니, 한양의 발 빠른 권력자들이 그 이익을 놓칠 리 없었다. 원래는 지역에서 돈을 주고 고용하게 했지만, 이익에 빠른 사람들은 아예 경주인 자리를 사들였다. 특히 고위 관료나 권력자들은 경주인의 자리를 사서 하인이나 지인들에게 운영을 맡겼다. 윤이동이 자신의 수군절도사 직위를 활용해 충청도 수영 경주인 자리를 800냥에 산 후, 홍응경에게 매년 쌀 20섬을 받는 조건으로 운영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노상추 표현에 따르면, 당시 대부분의 경주인 자리는 고위 관료들 집안 소유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큰 고을의 경주인 자리는 수천 냥에 거래될 정도였다. 800냥만 해도 당시 한양의 괜찮은 기와집 4~5채 가격이었으니, 경주인 자리가 얼마나 비싼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모든 부담이 오롯이 지역의 몫이라는 점이다. 돈으로 경주인 자리를 산 사람들은 지역과 연고가 없기에, 이들에게 역은 단순한 이익의 대상이었다. 투자금 이상의 이익을 추구했고, 그로 인해 지역의 많은 관청은 자기 지역 경재소에 수천냥을 빚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도 고위 관료들이 경주인들의 뒷배이거나 실소유자이니, 개혁 자체는 애초부터 꿈도 못 꾸었다. 지역을 위해 만든 제도가 외려 지역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한 꼴이었다. 마치 지역을 위해 권력을 줘 서울에 보냈더니,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해 자기 지역을 착취하는 일부 우리네 정치가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