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 영실(옥자연)의 마음속엔 이제 막 새로운 설렘이 씨앗을 틔운 참이다. 발굴 현장에서 벌목을 하는 우도(강태영)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다. 고백을 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집 앞 복도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은 영실은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행운이 오려는 건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그날 밤, 영실은 물과 사료를 준비해 계단에 꺼내놓는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한 사랑을 보듬듯 마주친 적도 없는 고양이를 위해 다정하게 먹거리를 준비한 영실은 물그릇 옆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생각한다. “우도도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라며 싫어할까? 인식처럼?” 그리고 장면은 8년 전, 영실이 인식(기윤)을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점프한다.
이완민 감독의 <사랑의 고고학>의 도입부다. 영화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속도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영실이 인식과 만나고 헤어지고, 결국은 완전히 떠나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자존감이 낮고 우유부단한 인식은 영실을 사랑하는 만큼 의심한다. 끊임없이 영실을 탓하고 그의 행실을 비난하며, 주변 관계를 파탄 내 고립시킨다. 인식에게 맞춰줄 수도,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는 영실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오래된 풍선처럼 생기를 잃어간다.
영화는 고고학자가 흙을 살살 긁어가며 “시간대가 다른 흙 사이의 색 차이를 발견하고 그걸 따라 유구선을 그어가듯” 두 사람의 8년간의 연애를 솔질한다. 그 세심한 작업을 통해 사랑과 폭력, 구속과 의존 사이를 가르는 희미한 선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인류학적 작업을 완수하면서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억압과 차별에 대한 폭발”(이완민)이 된다.
영화가 다루는 건 비단 사람들 사이의 폭력만은 아니다. 영화는 자연 속에서 문명의 흔적을 찾아내는 고고학자의 작업을 반전시켜 놓은 것처럼, 문명 속에 숨은 자연 착취의 흔적을 하나하나 수집한다. 사람은 매미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나무가 사라지는 걸 반기고, 재개발을 위해 고양이의 보금자리를 해친다. 많은 이들이 그레타 툰베리의 절규를 외면하고, 분리수거가 무용할 정도로 쓰레기를 쏟아낸다. 영실이 새롭게 끌리는 우도가 나무를 베기보다는 옮겨심기를 좋아하는 벌목꾼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궁금한 점이 있었다. 영실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고양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목소리만 들릴 뿐, 끝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완민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에는 고양이가 등장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PD가 이전에 작업한 영화에 개가 출연했다가 촬영 후 스트레스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양이를 출연시키지 않기로 했다.
나는 얼마 전에야 동물권행동 카라에서 ‘동물 출연 미디어 모니터링 본부’(동모본)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영화, 드라마, 유튜브 동영상 등 대중문화에서 동물이 재현되는 방식을 시민들과 함께 모니터링하고 관련해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다. 이는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장에서 말 ‘까미’가 사망한 이후 시작됐다.
카라는 홈페이지를 통해 미디어 속 동물의 안전과 권리를 위한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 : 어떠한 동물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도 배포하고 있다. 여기에는 “영화 장면 묘사를 위해 거북이 등딱지를 벗겼다” “새가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다리를 부러뜨렸다” 등 동물학대에 대한 현장 스태프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이렇게까지 해서 인간이 즐겨야 하는 이야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고통스럽지만 아름답고, 조용한 듯하지만 치열하게 완성하는 한 장면은 오히려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한 장면이 아닐까. 그건 내 상상 속에서 노랭이가 되었다가, 검정이가 되었다가, 삼색이가 되곤 하는 고양이의 얼굴이다. 이 다채로운 얼굴의 고양이가 영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기를. 영화를 곱씹으며 종종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