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30대 남성이 풀려난 뒤 곧바로 자신을 신고한 전 연인을 찾아가 흉기로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제폭력은 현재 또는 과거 연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정신적·성적 공격행위를 포괄적으로 뜻한다. 이번 사건은 경찰이 특별한 조치 없이 가해자를 귀가 조치한 후 10분 만에 벌어진 일이라 더 충격적이다. 경찰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아 참변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안일한 인식과 부실한 법·제도가 또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낳은 셈이다.
경찰은 지난 26일 김모씨를 보복살인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김씨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전 연인 A씨를 흉기로 살해한 뒤 차량에 태우고 도주했다 범행 8시간 만에 붙잡혔다. 경찰의 초동조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를 먼저 내보내 피해자 집 주변에서 범행을 준비할 수 있게 한 것부터 뼈아픈 실책이다. 지난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계기로 가해자·피해자 분리 조치에 신경 쓰겠다고 한 경찰 다짐은 무색해졌다. 경찰이 피해자 신변에 대한 위험성을 ‘낮음’으로 평가한 것도 안이한 판단이다. 교제폭력이 강력범죄로 번지기 전 사건 초기에 엄중하게 다뤄 통제와 협박이 신체·정서적 폭력으로, 폭력이 살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현행법상 연인 간 범죄행위에는 마땅한 피해자 보호 장치가 없다. 현행 ‘스토킹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과 ‘가정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규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이들 법률이 적용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발생했다. 교제폭력을 ‘반의사불벌죄’로 분류하고, 혼인·사실혼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정폭력처벌법을 적용할 수 없는 법률상 문제가 그대로 대형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피해자 보호조치가 지나치게 ‘정상가족’ 틀 안에 매여 있는 인식도 전환할 때가 됐다.
교제폭력은 해마다 늘고 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교제폭력 사건으로 검거된 이는 2014년 6675명에서 지난해 1만2841명으로 증가했다. 8년 새 92.4%나 급증했다. 28일에도 서울 마포경찰서는 전 연인을 폭행하고 강제로 차에 태운 혐의(감금·폭행)로 30대 남성을 붙잡았다. 경기 안산에서는 이날 30대 남성이 평소 알고 지내던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제폭력은 심각한 폭력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공유하고,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당장 국회에 계류돼 있는 데이트폭력 처벌법부터 시급히 입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