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난한 집 문을 두드리는 노동자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뭐라고요? 밥 굶고 일할 때가 있다고요?” ‘막내 작가’로 불리는 젊은 방송작가 얘기였다. 최저임금 수준의 원고료를 받아 방세·교통비·통신비 등을 지출하고 나면 밥값이 부족할 때가 종종 있다는 얘기였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갖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귀를 의심했다. 재차 물었다. 그녀는 서글픈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식이 방송국 작가가 되었다고 기뻐하는 엄마·아빠들 모습이 떠올랐다.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방송작가, 대리운전자, 라이더, 제화공, 아파트 경비, 청년 노동자 등을 조합원으로 둔 노조와 공제회가 전태일재단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들은 재단 형편을 잘 안다. 그럼에도 찾아온다. ‘전태일재단’은 가난하다. 서울시 소유 전태일기념관을 수탁받아 운영한 뒤로 돈이 많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기념관 예산은 재단 운영에 한 푼도 섞이지 않는다. 재단 운영·사업비는 매달 2500만원인데 정기 후원금은 1700만원에 불과하다. 부족한 재정은 뜻있는 노조와 개인 등의 특별후원금으로 채운다.

오죽하면 가난한 집의 문을 두드리겠는가. 노조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기 마련이다. 처우가 좋지 않은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노조는 조합비가 적게 걷혀 만성적 재정난에 시달린다. 비정규직·하청·플랫폼·프리랜서 등 불안정 노동자들이 가입해 있는 노조가 그렇다. 방송작가유니온도 운영비 지원을 요청했다. 전태일재단은 선뜻 응했다.

올해 초 전태일재단 이사회가 열렸다. 예산안을 심의하며, 이사들이 사무국 직원 임금을 5% 인상하라고 주문했다. 그랬는데 사무국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임금을 인상할 여력이 있으면 전태일재단 문을 두드리는 노조와 공제회 등에 더 지원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임금을 올리라는 이사들과 올릴 수 없다는 사무국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졌다. 이사들은 사무국의 뜻을 꺾지 못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돈이 많아 배곯으며 일하는 열서너 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것이 아니었다. 주머니 속 버스비 30원을 탈탈 털어 풀빵을 사준 뒤 지친 몸을 이끌고 평화시장에서 창동 판잣집까지 4시간 거리를 휘청휘청 걷고 뛰며 퇴근했다. 야간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쪼그려 자기도 했다. 전태일은 자신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실천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시다’와 ‘미싱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바치고 산화했다. 전태일재단의 재정운영 원칙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처럼’이다.

갈수록 전태일재단 문을 두드리는 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기념사업회 시절부터 40년간 한 차례도 하지 않았던 후원의날 ‘태일이네 문을 열다’를 진행한다. 기금은 후원자와 재단 공동 이름으로 불안정 노동 단위에 지원한다. 많은 시민들이 전태일재단 정기 후원회원(www.chuntaeil.org)이 돼 주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특별후원에도 참여(우리은행 1005-201-664676 전태일재단)해 주셨으면 한다.

불안정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길 바랐던 전태일의 ‘미완의 염원’에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노동자들이여, 태일이네 문을 더 활짝 열고 들어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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