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열혈팬’ 뇌성마비 일본인
8일부터 3박4일 동안 한국여행 계획
교통·공연 관람 등 하나부터 열까지
‘외국인 장애인’에겐 더 높은 핸디캡
![게티이미지](https://img.khan.co.kr/news/2023/06/06/news-p.v1.20230605.657d3b2a541a4e86aee3eb0e5578f04d_P1.jpg)
게티이미지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일본인 가루베쿠미코씨(50)는 한국 드라마 열혈팬이다. 배우 박해진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는 SBS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JTBC 드라마 <신성한, 이혼> 등을 보면서 김남길과 조승우 배우에게도 푹 빠졌다. 오는 8일부터 11일까지, 3박4일 한국 여행도 계획하고 있다.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김남길 팬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큰맘 먹고 잡은 일정이다.
한 달 전 부푼 마음으로 항공권을 찾을 때만 해도 쿠미코씨는 그토록 수많은 난관이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6일, 출발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으나 쿠미코씨의 여행은 이동수단부터 병원 진료, 공연장과 식당 방문까지 모든 게 불확실하다. 쿠미코씨는 이날 메신저를 통한 인터뷰에서 “10살 때 홀로 기차를 타본 이후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이 정도로 고민한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가장 큰 걱정은 한국 여행 둘째 날인 9일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KTX 열차를 타는 것이다. 쿠미코씨는 장애인석을 예약하기 위해 여러 차례 결제를 시도했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쿠미코씨는 외국인이라 주민등록번호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지인의 도움으로 코레일 측에 전화로 문의하자 “현장에서 발권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는 당일에 좌석이 일찍 매진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열차를 타지 못할까 봐 고민이다.
좌석 예약이 까다로운 건 교통수단만이 아니다. 뮤지컬 공연장 자리도 처음엔 휠체어석이 아닌 일반석으로 예약해야 했다. 이번에도 한국인 지인 도움으로 부산 드림씨어터에 전화를 걸자 “장애인증이 없으면 할인은 못 해준다”는 답을 들었다. 쿠미코씨는 “할인은 괜찮으니 좌석만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둔 상태다. 그의 한국 지인 홍윤희씨(49)는 “한국에 친구가 있는 사람도 이 정도인데 지인이 전혀 없는 외국인 장애인들은 어떻게 여행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일본인 가루베쿠미코씨(50)가 서울 강남역 인근 피부과에 휠체어 진입 가능 여부를 문의하며 주고 받은 대화 | 독자 제공](https://img.khan.co.kr/news/2023/06/06/news-p.v1.20230606.2b853fd530724062b1a5e70fe33cb72b_P1.png)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일본인 가루베쿠미코씨(50)가 서울 강남역 인근 피부과에 휠체어 진입 가능 여부를 문의하며 주고 받은 대화 | 독자 제공
무사히 서울행 열차를 탄다고 해도 계획한 대로 일정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둘째 날 방문하려 했던 피부과 일정에는 벌써 지장이 생겼다. 서울 강남역 인근에 있는 이 병원은 일본 미용·의료 중개플랫폼에 ‘일본인 손님을 환영한다’고 홍보하는 곳이다. 그러나 정작 쿠미코씨가 휠체어로 방문할 수 있냐고 묻자 “안내가 어렵다”고 했다.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줄 직원이 없다는 이유였다. 쿠미코씨는 다른 피부과라도 알아보려 했으나 통역 등의 문제로 아직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쿠미코씨가 겪은 것과 같은 병원의 휠체어 진입 거부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장애인 차별’이라는 판단을 내린 적이 있다. 지난해 12월 인권위는 병원이 전동휠체어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 이동권 보장 의무에 저촉된다며 시정을 권고했다.
모험을 즐기는 편이라는 쿠미코씨는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며 스스로 다독였지만 급기야 일본에서 출발도 못 할 상황에 내몰리자 평정심을 잃었다. 그는 지난달 중순 에어부산 항공사의 한국행 비행기를 예약하며 휠체어 이용 상황을 알리는 메일을 보내뒀는데, 한 달 가까이 답이 없던 항공사가 갑자기 “가능 여부를 검토 중”이라는 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화가 난 쿠미코씨가 “언론에 알리겠다”고 항의한 후에야 항공사는 “휠체어 진입이 가능하다”는 답을 줬다. 출발이 불과 사흘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협동조합 ‘무의’ 이사장인 홍씨는 “항공사도, 철도 회사도, 모든 곳에서 외국인 장애인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놨다”고 했다. 휠체어를 타는 딸을 둔 그는 “딸과 함께 유럽에 갈 예정인데,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는 열차를 예매할 때는 쿠미코씨가 한국에서 겪는 것 같은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면서 “쿠미코씨가 단계마다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일본인 가루베쿠미코씨(50)가 항공사 에어부산으로부터 지난 2일 받은 메일. 에어부산 측은 예약한 지 한달 가까이 지나 “휠체어 진입 가능 여부를 검토 중”이라는 메일을 보냈다. | 독자 제공](https://img.khan.co.kr/news/2023/06/06/news-p.v1.20230606.cfb75e2ad580482598a5dbe4b5b8254a_P1.png)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일본인 가루베쿠미코씨(50)가 항공사 에어부산으로부터 지난 2일 받은 메일. 에어부산 측은 예약한 지 한달 가까이 지나 “휠체어 진입 가능 여부를 검토 중”이라는 메일을 보냈다. | 독자 제공
해외에서는 국경을 넘어 모든 장애인의 접근성이 보장되도록 법을 만드는 추세다. 유럽연합 이사회는 2019년 4월 ‘유럽 접근성법’을 승인했다.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유럽시민이 교통서비스 등에서 더 나은 삶을 보장받도록 회원국들에 입법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흘 전에야 한국행이 확정된 쿠미코씨는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 있다. 기대감이 앞서지만 두려운 마음도 적지 않다. 전동휠체어 베터리가 방전돼 멈춰버릴 수도, 맛집을 찾아갔다가 경사나 계단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일본으로 돌아오는 항공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여행 곳곳에 변수가 숨어 있다. 그는 “관광은 줄이고 식사는 편의점 밥으로 하려고 한다”고 했다. 쿠미코씨는 무사히 한국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