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 자연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들](https://img.khan.co.kr/news/2023/06/08/l_2023060801000172400020472.jpg)
대개 이름은 그 대상의 특성을 반영해 지어진다. 하지만 종종 오해나 실수로 인해 본질과는 무관하거나 혹은 전혀 반대의 이름을 얻고는 그대로 굳어진 경우도 있는데, 바로 무화과(無花果)가 대표적이다. 무화과의 이름은 ‘꽃이 없이 열리는 열매’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실상 무화과는 꽃이 없는 식물이 아니다. 무화과의 꽃은 꽃받침이 크게 자라나 꽃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감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화과 열매라고 생각하는 그 부위 자체가 실상은 꽃인 것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여기까지는 그저 꽃이 특이하게 생겼다고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 꽃이 구조상 폐쇄된 상태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보통 식물은 움직일 수 없기에, 곤충이나 새, 바람의 힘을 빌려 꽃가루받이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닫힌 구조는 꽃가루 전달에 불리하다. 게다가 무화과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식물이라 유능한 꽃가루 전달자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을 조합하자면, 무화과에는 꽃받침 안쪽에 단단히 밀봉된 수꽃의 꽃가루를 인위적으로 끄집어내 암꽃에 전달하는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무화과좀벌(이하 좀벌)은 몸길이 2~3㎜에 불과한 아주 작은 곤충으로, 무화과꽃에 파고들어 알을 낳고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들은 무화과 내부를 갉아 먹으며 자라다가 성충이 되면 구멍을 뚫고 밖으로 나와 다른 무화과꽃에 알을 낳으며 세대를 이어가는 생명체다. 여기까지 보면 좀벌은 무화과에 기생하는 여타의 해충처럼 보인다. 하지만 좀벌과 무화과의 관계는 일방적인 기생이라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무화과의 암꽃과 수꽃 그리고 좀벌 사이의 역학 관계가 미묘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화과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기에 좀벌이 이 둘 중 어느 쪽으로 들어갈지는 순전히 확률적 우연에 기인한다. 좀벌 입장에서는 수꽃에 들어가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수꽃은 좀벌을 받아들이고 이들이 낳은 알들도 기꺼이 품어주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은 부화하고 애벌레는 성충으로 자라난다. 사람은 남성이 더 크지만, 좀벌은 암컷이 더 크다. 수컷들은 성충이 되어도 날개가 자라지 않으며 체구도 암컷에 비해 훨씬 작다. 이들은 알을 품지도 않고 알을 낳기 위해 무화과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기에 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화과 수꽃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암컷 좀벌들뿐이다. 수정한 알을 가득 품은 암컷은 그 어미가 그랬듯이 알을 낳기 위해 살던 터전을 떠나 날갯짓을 한다. 이때 태어난 이후 오로지 무화과 수꽃 안에서만 살아온 암컷 좀벌의 몸은 온통 무화과 꽃가루로 뒤덮여 있기 마련이다.
무화과의 꽃가루와 자신의 알을 몸 안팎으로 품고 날아오른 좀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확률이다. 운좋게도 좀벌이 파고든 꽃이 수꽃이라면, 좀벌은 알을 낳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좀벌이 무화과의 암꽃으로 파고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무화과 암꽃은 강력한 단백질 소화효소인 피신을 분비해 좀벌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기 때문이다. 좀벌의 세대는 거기서 끝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좀벌의 몸에 묻어 함께 들어왔던 무화과 수꽃의 꽃가루는 고스란히 남아 암꽃 속의 암술에 전달되고 종자를 맺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화과와 좀벌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생존과 번식을 보장하는 관계이면서, 한편으로는 각자 서로를 극단적으로 이용하는 극한의 확률게임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고사를 떠올리며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큼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체의 진화 방식에는 결코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연하게도 그런 전략을 이용한 개체가 살아남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굳이 읽어내야 할 교훈이 있다면, 자연을 참고로 하되, 무화과와 좀벌과는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를 찾는 노력일 것이다. 뼈를 끊고 살을 잘라내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 논의와 양보와 타협을 통해 가급적이면 서로 간의 희생은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이익은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지적생명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존재들에게 어울리는 방법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