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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옹호

물봉숭아 쩔어붙은 골짜기

두꺼비 어정시러이 기어가는 저녁

돌 틈서리 바위굴마다엔 가재가 살고

가재굴 앞 돌멩이 밑엔 꾸구리가 살고

쇠똥 같은 초가지붕 아래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가지나물에 마늘쫑다리

고추장 풀어 지진 감자 먹고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호박잎 물들어 파란 밥 먹고 살았습니다

찬물구덩이 물 길어다먹고

도롱골 오박골 가릅재로 밭매러 다니며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놓은

할아버지 발톱 할머니 손톱

밥풀 으깨 하늘에다 붙이고

도랑물 소리 마당 가득 쟁여놓고

우리들이 살았습니다

- 송진권, 시 ‘못골 살 때’, 시집 <원근법을 배우는 시간>

일어나자마자 ‘살아 있는 마트’인 텃밭으로 향한다. 청치마상추는 넓게 자리를 차지한 채 플레어스커트처럼 주름 잔뜩 잡고 있고, 적상추는 쭉 뻗은 타이트스커트를 입은 것 같다. 아삭거리는 로메인과 담배상추는 두꺼운 잎마다 푸른 물 가득 쟁여놓았다. 외출하게 되면 텃밭 마트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뽑거나 따게 된다. 친구들에게 전해줄 장바구니 중 상추와 치커리와 샐러리, 왕고들빼기 등 쌈채 종류들은 가장 만만한 품목이다. 신문지에 싸서 비닐봉지 하나 씌우고 종이팩에 넣으면 작업이 끝난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벼 벤 논에 눈이 쌓이고 쌓인 눈 위에 눈이 내리고, 찰방찰방 물 채운 무논에 어린 모가 심어지는 동안, 김종철 선생의 <땅의 옹호>를 다시 읽었다. 2008년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인데 머리맡에 두고 자주 들춰본다. 읽을 때마다 놓치거나 음미하지 못한 새로운 뉘앙스가 발견된다. 오늘날 농부는 옛날의 농부처럼 “논밭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며, “독성 화학물질과 기계를 가지고 땅에 대하여 공격적인 전투를 감행하는 생산도구들이” 되었다는 글귀에 오래 마음이 머문다.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적 주술(呪術)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에게 사나운 짐승이 되어버렸”다는 말씀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산골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총체적인 농촌 붕괴 속에서 자리와 이권과 자존심을 둘러싼 경쟁은 사람들의 말까지 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육중한 트럭이 논에 흙을 붓고 땅을 짓밟는 불도저 소리가 며칠째 들린다. 저 흙은 어디서 다 퍼오나. 10년 사이, 마을 논 중 반은 비닐하우스로 스마트하게 대체되었다. 밤에 내려다보면 불빛 사이 언뜻 비치는 비닐하우스는 멋진 호수처럼 보인다. 베어 먹힌 산의 어깨와 등허리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개발 위에 개발, 개발 옆에 개발이다. 어쩔 땐 영영 개발이 안 될 것 같은 더 깊은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안다. 도시 어디 후미진 곳이든 숲이든 도망갈 데가 없다는 것을. “쇠똥 같은 초가지붕 아래” 함께 밥 나눠먹고, 물봉숭아와 두꺼비와 가재와 꾸구리가 공생하던 날들은 어디로 갔나.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놓은/ 할아버지 발톱 할머니 손톱/ 밥풀 으깨 하늘에다 붙이고/ 도랑물 소리 마당 가득 쟁여놓고” 살던 우리들은 다 어디로 갔나.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회가 통과시킨 ‘양곡관리법’에 대놓고 거부권을 행사하는 시절, ‘농(農)의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식량자급이나 식량주권의 문제, 혹은 환경이나 에너지 위기와의 관련”에 국한되지 않으며 ‘농(農)’은 삶의 태도이자 관계이자 예술과 윤리, 생명 자체와 직결된 문제라는 김종철 선생에게서 땅의 목소리를 듣는다. “성장의 필연적인 소산인 사회적 양극화, 불평등, 좌절, 실패가 보편적 현상”이 된 시대에 관계로서의 민주주의를 꿈꾼다. 땅을 막대한 불로소득을 안겨줄 부동산 자산으로만 생각하는 투기꾼들의 세상에서, 바닥의 소리를 듣는다. 끊임없이 땅을 파헤치고 죽이는 시대에, 살아 있는 ‘관계로서의 땅’을 설파하고 가난과 불편을 ‘공생공락의 가치’로 전환시키려 애쓴 간절한 목소리를.

금낭화와 매발톱이 지고 난 후 양귀비와 데이지가 피고, 붓꽃이 진 후 백합과 나리가 꽃망울을 준비하고, 마늘잎은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그것은 땅속에 있는 마늘이 영글어가고 있다는 신호겠다.

6·25 즈음은 마늘 캐는 때, 6월25일이면 김종철 선생 가신 지 만 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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