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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의 자격

입력 2023.06.13 03:00

수정 2023.06.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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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연방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는 인종차별, 총기 규제 등 미국 사회가 당면한 쟁점에 관해 치열한 법적 논증이 오갈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백악관과 후보자의 목표는 인준 통과이고, 이를 위해 검증된 전략은 답변을 회피하는 것이다. 민감한 질문이 나오면, 나중에 재판 대상이 될 수 있는 법적 이슈에 관해 구체적 입장을 밝히기 곤란하다는 식으로 넘어간다. 보는 입장에선 맥 빠지기도 하지만, 법관은 개별 사건에 관해 선입견을 배제하고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그래도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됨됨이를 직접 보고 사법철학을 본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당시 공약에 따라 흑인 여성 케탄지 브라운 잭슨을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2022년 3월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패트릭 레이히 상원의원은 “후보자는 어떤 대법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잭슨 후보자는 본인이 대법원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자신보다 먼저 대법관을 지낸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과 관점이라고 답변했다. 구체적으로는 국선변호인, 양형위원회 위원, 연방법원 법관으로 쌓은 역량의 총합이고, 무엇보다 민권운동의 혜택을 받은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이라고 언급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대법관을 실력으로 뽑아야지, 왜 인종과 젠더를 고려하냐고. 그렇지 않다.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은 그전까지 대법원을 구성했던 백인 여성과 남성, 흑인 남성, 히스패닉 여성이 볼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다. 미국 건국 이래 대법관을 지낸 115명에게 없던 국선변호인 경력이 있기에, 잭슨을 영입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이라는 영예로운 기관은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관점과 경험을 수혈받게 된다. 변호사, 로스쿨 교수 또는 항소법원 법관이 대부분의 경력인 기존 대법관에게 없는 시각을 얻으려면 그들과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진 사람을 임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면 임명할 대법관 후보자에게 바라는 자질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법률가로서의 실력뿐만 아니라 공감능력이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이상주의자 오바마가 객관적 법 적용을 무시하는 비현실적 진보주의자로 대법원을 채우려 한다는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 후 처음 지명하는 대법관으로 소니아 소토마요르를 선택하자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최초의 히스패닉 대법관을 만들기 위해 발탁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공화당이나 보수 진영만이 아니라, 진보 성향 인사 역시 그녀가 보수 대법관들에 맞설 실력과 중량감을 갖추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바마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자신이 내리는 무거운 판결의 맥락을 이해하는 마음, 임신중지를 반대하는 가톨릭 사제에게뿐 아니라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는 10대 임신부에게도 공감하는 능력, 자수성가한 기업인만이 아니라 공장 노동자에게 공감하는 능력, 소수자의 삶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법관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원천이라고 말이다. 푸에르토리코 이민 2세로 태어나 대법관 후보자로 거론되기까지 소토마요르가 살아온 삶의 성취와 굴곡을 보고, 오바마는 그녀에게 대법관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대법관의 자격은 간단하지 않은 가치 판단의 문제다. 후보자 선정에는 여러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소토마요르나 잭슨처럼 소수자의 요소를 여럿 갖춘 사람이 지명되면 실력 우선이나 능력주의가 거론된다. 두 사람 모두 예일 혹은 하버드 로스쿨을 나왔고, 검증된 연방법관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을 대법원에 받아들인 경험은 다양성이 연방대법원이라는 기관의 역량을 증대시켰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법원의 위상과 명성에 누가 된 것은, 예전의 대법관과 다른 스펙을 가진 대법관이 아니라, 대법관 개인의 윤리 문제 혹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한국의 대법관 임명에는 대법원장의 제청, 대통령의 임명, 국회의 동의를 통해 입법·행정·사법 3부가 모두 관여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신중한 절차라는 뜻이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관의 역량과 위상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치열한 검증과 임명 과정을 거치는 미국의 사례가 보여 준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는 대법원 구성이 되길 바라고, 소모적 정쟁이 아닌 후보자가 어떤 대법관이 될지 검증하는 청문회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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