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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한령과 탈한국

입력 2023.06.15 03:00

수정 2023.06.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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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시장을 다루는 유통담당 기자의 경우 독특한 아이템이나 유별난 사건이 없으면 신문 앞면에 실리는 기사를 쓰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2017년 유통 기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1면에 내보낼 기사를 찾아야 했다. 중국이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도입을 이유로 그해 초부터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한국 배우나 가수들의 출연과 공연이 취소되고, 한국에 오는 ‘유커’(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한국산 게임 서비스가 하루아침에 중단되고,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매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왕훙’(중국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은 한국산 제품을 외면했고, 파리 날리는 면세점 사진이 신문 앞면을 장식했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이호준 경제부 차장

중국의 몽니가 심해지면서 정부에서 공식 피해신고센터까지 운영했는데 신고 실적이 줄어들자, “거래가 다 끊어져 더 신고할 것도 없어졌기 때문”이라던 담당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잊고 지내던 ‘한한령’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한국의 탈중국이 무역적자를 심화시켰다는 중국대사의 발언을 접하면서다. 중국은 한때 주식시장으로 치면 지금의 2차전지에 버금가는 최고의 테마주였다. 왕훙이 제품을 집어들기만 해도 매출이 수직상승하고, 수천명의 중국 직원들이 전세기로 한국에 단체관광을 오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한령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 이후에도 우리는 탈중국 비슷한 것조차 해본 적이 없다.

대중 무역수지 전선에 이상신호가 도드라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년의 일이다. 흑자 규모가 200억달러대로 쪼그라들더니 올 들어서는 최대 적자국으로 반전됐다. 코로나19 때문만이라고 치부하기도 뭣한 것이 애초에 한국에서 중국의 흑자국 순위 자체가 2018년 1위에서, 2019년 2위, 2020년 3위로 갈수록 떨어지는 추세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 어떤 탈중국 움직임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중국의 한한령이 비록 단편적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체를 구성하는 통일성 있는 조각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대중 무역적자의 본질이 탈중국이 아니라 탈한국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1992년 수교 후 중국은 사실상 한국의 ‘달러박스’였다. 세계의 공장 중국이 열심히 돌아가던 시절의 유산이었다. 우리는 중간재를 수출해 돈을 벌었고 중국은 세계에 완제품을 납품했다. 그동안 중국은 꾸준히 내수시장을 돌보고 국산화율을 높였다. 결과적으로 부가가치가 낮은 저·중위 기술제품 비중은 점점 덜 수입하고, 자급이 어려운 반도체 같은 고위 기술제품의 수입만 늘렸다. 이렇게 중국과 한국은 보완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로 접어들었다.

중국이 2015년 내놓은 ‘제조 2025 전략’을 보면 중국은 제조업에서 한국을 가장 먼저 따라잡을 ‘목표’로 정하고, 2025년까지 한국을 뛰어넘겠다는 탈한국 전략을 명확히 했다. 대한상의가 최근 대중 수출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중국과의 기술격차가 비슷하거나 뒤처진다’는 응답이 40%를 넘었고, ‘3년 이내에 따라잡힐 것’이란 응답도 36.6%나 됐으니 얼추 시기도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소비재도 마찬가지다. 북미 시장을 질주하는 현대차는 중국에서 팔리지 않는다. 한때 중국 시장을 20% 넘게 점유했던 삼성의 휴대전화도 더 이상 중국에서는 맥을 못 춘다. 중국이 자동차 수출 세계 1·2위를 다투고, 비보나 아너, 오포 같은 자국 제조사들이 내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한국 운운할 것도 없다. 이제 한국 입국장에서 일제 코끼리표 밥솥을 사들고 들어오는 여행객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일국의 대사쯤 되는 사람이 이런 사실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있지도 않은 탈중국과 무역적자를 엮어 윽박지른 것은 경제를 지렛대로 앙갚음에 나설 수 있다는 노골적인 경고다.

출범 후 일방적으로 미국과 일본에 치우친 행보를 보여온 윤석열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크지 않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양국 정부의 입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막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다. 하지만 ‘중국의 승리에 베팅’하라고 강요하는 중국과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 달러박스 중국의 위세에 눌려 무력하게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어떨까? 선택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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