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제도서전 ‘블랙리스트 항의’ 작가들 퇴거, 야만적 조치다

국내 최대 책 축제인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출판·문학인들이 대통령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송경동 시인, 정보라 작가 등 10여명의 출판·문학인들은 지난 14일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장 앞에서 박근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자인 오정희 작가의 도서전 홍보대사 해촉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후 이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처 직원들이 막은 것이다. 도서전에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참석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번 사건은 문화예술을 대하는 정권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오 작가의 홍보대사 해촉을 요구한 이들의 목소리는 정당하다. 오 작가는 한국문화예술위원이던 2015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심의에서 좌파 성향을 가진 문인들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는 데 관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진상조사에서 문화예술위 사무처로부터 블랙리스트 실행 지시를 보고받은 사실이 인정됐다. 이 사건은 국가권력이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특정 문화예술인들을 지원에서 배제한 국가범죄라 할 수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조사 결과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은 8931명, 단체는 332개에 달했다. 서울고등법원은 2018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경호처 조치가 과잉 경호가 아니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대통령 부인은 경호처의 경호 대상이 맞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를 비판하는 종이 피켓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요인 안전에 위협을 제기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과도하다.

윤석열 정부에서 문화예술 검열이 다시 작동하는 조짐은 우려스럽다. 문체부가 윤 대통령 풍자 작품에 상을 준 학생만화공모전 측에 경고한다든지, 행정안전부가 부마항쟁 기념식 초청 가수의 노래 가사를 문제 삼아 교체를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문체부는 최근 출판을 지원하는 세종도서 사업에 대해 객관성·공정성을 이유로 “구조적 수술”을 예고했다가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문화예술을 보는 시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체제 순응적인 문화예술만 허용하겠다는 태도는 문화 콘텐츠 강국이 된 나라의 격에도 맞지 않다. 코로나19 엔데믹 후 최대 규모로 치러진 국제도서전에서 나라 밖까지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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