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면에 계급과 젠더의 교차 지점 문제들에 대해 쓴 지 2년 반이 됐다. 젠더 문제가 헛된 논의로 빠지는 현상은 다음 노래 가사로 꽤 설명이 된다. “여자인 내가 여자의 삶에 대해서 얘길 하는데/ 당신은 김어준 얘길 듣고 와서 입을 열려 하네(신승은 ‘당신은’).” 빈곤, 복지 문제도 비슷하다. 그런 걸 안 받아도 되는 사람들은 많이 말한다. 그걸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말문이 막힌다. 지난 원고를 살펴보면 그간 이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글의 초고엔 20대인 동생이 수급자로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절실한 상황인데도 보증금 대출을 못 받은 얘길 썼다. 사람들이 안 믿을까 봐 사업명과 서류명을 세세히 확인했다. 모두 지웠다. 결국 우리가 노숙을 하게 되지 않은 이상, 힘없는 이야기일 게 분명하니까.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대해 핵심 논의를 막는 마법의 문장이 있다. “○○ 중에 양심 없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인데?” 그 순간 논의는 엉망이 되고, ‘무자격자’를 색출하자는 여론이 갑자기 커진다. 정부는 전수조사를 해서 ‘낭비’를 막겠다고 달려들고, 사정이 있는 사람들은 더 숨죽인다. 그러다가 누군가 굶어 죽거나, 물에 빠져 죽어 발견되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왜 ‘불쌍한’ 사람을 미리 찾아내지 못했냐고 한다.
이야기의 힘을 믿어서 글을 써왔다. 그런데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이해의 틀이 있어야 감명 깊게 전달된다. 한 편의 글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상징적인 포인트를 건져내 잘 다듬어 엮는 게 이야기꾼의 자질이다. 하지만 어떤 경험은 좋은 이야기로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빈곤과 복지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자격자와 ‘불쌍한’ 사람이 주인공인 두 가지 이야기만 있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아득바득 대학원에 와서 한국의 사회 안전망 문제에 대해 제대로 말할 근거를 찾았다. 예를 들면 박정희 이후 모든 정부가 발전주의 기조를 가지고 의료, 주거 보장 등에 써야 하는 재정 부담을 가족 단위에 떠넘겨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덧붙여도 소용없었다. ‘진짜’ 당사자의 말을 남기겠다고 글을 쓰는 것은 그만뒀다. 그건 가능하지 않으니까. 대신 더 넓게 조망하며 구조적인 이해 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예를 들어 외로움이 한국인 공통의 문제로 여겨진다는 점에 대해선 여전히 생각 중이다.
‘털어놓을 데’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약점 잡힐 것 같다는 불안이 말문을 막는다는 이야기도. 얼마 전엔 동료와 이런 얘길 하기도 했다. 소수자의 이야기라면 특별해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맞죠. 나는 그냥 난데. 대화의 결론은, 여기는 ‘나를 열어 남들에게 드러내기’가 안 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먼저 드러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글을 써왔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살펴보니, 여기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어진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는 힘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 돌아다니는 이야기의 가짓수가 너무 적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사람도 적다. 나도 이제 그다음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