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서양음악 또는 클래식 음악을 다루는 이들은 18~19세기에서 작곡된 서유럽의 고전들을 자주 살펴보지만 내가 찾는 쪽은 그보다 더 이전이거나 이후거나 고전이 아닌 것들이다. 말하자면 위대한 고전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 그다지 기여하지 않은 음악, 누군가에게 계승되지 않은 채 반짝하고 사라졌던 장르, 이름을 남기지 않고 그저 떠돌았던 어떤 음악가들, 한 작곡가의 음악 중에서도 고전의 반열에 오른 대작이 아니라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은 소품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으로서의 서양음악 위상에서 살짝 벗어나는 음악에 가깝다. 이런 어수선한 사례들을 되돌아보며 나는 명쾌한 고전의 역사가 아닌, 훨씬 흐릿하고 유연한 음악 전통으로서의 서양음악에 대해 생각한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그와 관련해 내가 자주 모습을 상상해보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 유럽 땅에서 ‘작곡가’라는 직업이 널리 퍼지기 전 이야기와 노래 보따리를 들고 떠돌아다녔던 음유시인들, 그중에서도 트루바두르 또는 트루베르, 혹은 트로바토레라 부르던 이들이다. 떠돌이이자 음악가, 이야기꾼, 때로는 기사이기도 했다는 이들의 정체성이 곧장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떠돌이들이 갈 수 있던 곳은 어디까지였는지, 언제 어디서 어떤 이들을 마주하고 노래하고 이야기했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한 프랑스 음악 연구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였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는 마냥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을 ‘찾고 발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은 ‘트루베’라는 단어는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음악이 자연 어딘가, 세계 어딘가에 이미 존재한다고 믿었고, 그들은 그것을 찾고 발견할 뿐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음악을 제 나름의 이론적 법칙에 맞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 어딘가에 음악이 또는 음악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는 마음은 ‘작곡가’의 역사 속에서 아주 또렷하게 계승되는 것 같지는 않다. 대신 나는 이들과 나란하게 놓아볼 만한 사람들을 음악사 책을 한참이나 넘겨본 뒤에야 발견한다. 소란스러운 기차역, 금속성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주방 등 우리의 삶 속 공간에서 들려오던 소리들을 녹음하고 조각내서 이어붙였던 피에르 셰퍼의 구체음악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숲이든, 빙하 속이든 혹은 어떤 장소라 부를 수 없는 나름의 필드를 오가며 소리를 찾아오는 필드 레코디스트들의 일이 바로 그런 예다. 그들은 세계에서 발견한 소리를 측정하고 기록하며, 때로는 그 소리들을 묶어주는 아주 낮고 느린 리듬을 탐구하거나 그 소리들을 다듬고 재구성해 음악화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리의 표면이나 음악의 질서는 무척 다르지만, 이들이 모두 자신의 세계를 음악적으로 듣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동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음악사의 주요 서사나 지금 주류 음악문화에서 계속 강화되고 있는 음악가 모델로부터는 살짝 벗어나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에 주목하는 서양음악사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을뿐더러 대체로 그 전후를 추적할 수 있는 역사선상에 놓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음악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면, ‘발견하는 사람들’의 전통은 작곡가나 음악가 모델보다 훨씬 더 유서 깊고, 지금 시대의 음악가 모델이 어쩌면 아주 한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일과 맞물리는 음악의 모델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음악은 말이 전혀 안 되는 것처럼 들리거나 음악처럼 들리지 않지만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음악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을 막연히 떠올리며 서양음악을 몇몇 고전으로 이루어진 말끔한 역사가 아닌, 어수선한 전통들을 지닌 조금 더 유연한 것으로 다시 이해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