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능 킬러문항 배제’에 “혼란 가중” 일침
“발표시점 안 좋아...평가원·교육부서 논의해야
사교육 줄이기 위해선 ‘경쟁체제’ 완화 필수적”
2023 수능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1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여자고등학교에서 수험생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2022.11.17 사진공동취재단
정부가 ‘수능 킬러문항 배제’ 지침을 내놓은 것을 두고 초대 교육과정평가원장을 지낸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81)가 “정부가 충분한 논의없이 발표해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김영삼 정부 때 대학수학능력시험 제도를 설계·시행해 ‘수능의 창시자’로 불린다.
박 교수는 20일 통화에서 전날 정부·여당이 발표한 ‘수능 킬러문항 출제 배제’ 방침에 대해 “소위 ‘킬러문항’을 출제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출제했는지를 봐야 한다. 교육과정 안에서 사고력을 측정하려고 하는 의도를 확인해야 하지 의도를 배제하고 난이도만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사고력 증진 위해 융·복합적 문제 필요···고난도 문제 변별력 확보 위해 불가피한 면 있어”
박 교수는 “시험에서는 변별을 위해서는 어려운 문제와 쉬운 문제를 섞어 낼 수밖에 없다. (고난도 문항 출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꼬아놓은 문제로 볼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변별력을 주기 위해, 좋은 문항을 만드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박도순 초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면서 “교육과정 내에서 문제를 출제하라는 것이 교과서를 중심으로만 내라는 뜻이 아니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출제하는 건 결국 암기 교육밖에 되지 않는다”며 “교육과정 내에서 사고력을 길러준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사고력을 가장 잘 기르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하는 것은 출제자의 권한이자 의무다.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는 모든 출제자가 굉장히 고심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수능이 도입될 때 ‘교육과정 내용과 수준에 적절한 문제를 통합 교과적으로 출제해야 한다’고 지침에 명시했다. 도저히 제시간 안에 풀 수 없는 문제라면 모르겠지만 융·복합적인 내용을 출제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독해력을 재기 위해서 국어 내용만 다뤄야 하는 건 아니고 음악을 가지고도 독해력을 측정할 수 있다. 논리적 사고력도 마찬가지로 국어·과학·심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측정될 수 있다”며 “4차 산업혁명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게 이런 통합적 사고능력”이라고 했다.
“간섭 계속되면 누가 출제위원하려고 하나···출제 방향은 ‘전문가’ 한 명이 결정해선 안 돼”
정부가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이런 지침을 내놓은 데 대해서는 “발표시점이 좋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평가원과 교육부 내부에서 논의하면 되는 것이지 밖에다 공표하면 감정만 상하고 혼란만 초래하지 도움될 것이 없다”며 “이럴 때 논의를 하라고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어 둔 것 아닌가. 평가원, 교육위 등에서 논의의 밑바탕을 만들고 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정부가) 그러지 않고 있다”고 했다.
6월 모의평가 난의도 문제로 교육부 대입담당 국장이 경질된 데 이어 이규민 평가원장이 사임에 이른 것을 두고도 이례적이라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보통 수능이 끝나고 나서 평가원장이 (수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중간에 사퇴한 기억은 없다”며 “요즘 수능 출제위원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정부가) 간섭을 하면 누가 수능 출제위원을 하려고 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출제와 관련된 것은 아무리 교육을 잘 아는 사람이라도 한 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 ‘전문가’라고 해도 믿어서는 안 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논의해야지 한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하라’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교육부가 ‘교육범위를 벗어난 문제출제’를 이유로 평가원 감사에 나선 것에 대해서도 “교육부가 무슨 권한으로 감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평가원에 명확한 비리 혐의가 있다면 감사원이 감사하면 될 일인데 그런 것도 아닌데 교육부가 나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해선 수능 난이도가 아니라 경쟁체제를 완화할 방안 찾아야”
박 교수는 사교육을 줄이는 것은 필요하다면서도 지금 정부의 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사교육을 없애는 건 여러 가지 방법을 같이 동원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과외금지’도 해보고, 입시제도도 바꿔보고, 추천제로도 해보고 온갖 방법을 다 써봤음에도 제대로 정착이 되지 않은 것은 사회 체제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사교육을 줄이려면 학교 서열을 없애고, 직장에서(직원을 뽑을 때) 대학을 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조치없이 단순히 수능 난이도를 어떻게 하면 사교육이 줄어들 거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며 “사교육은 기본적으로 경쟁체제가 있으면 생길 수밖에 없다. 정부는 경쟁체제를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데 지금 (정부가)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내세운 ‘공정수능’을 두고는 “단순히 채점방식 이런 게 공정하다고 공정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타당해야 공정한 것”이라며 “어떤 기준을 가지고 뽑을 것이냐가 내용의 타당성을 결정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다양하므로 정부뿐 아니라 학부모 등이 다 같이 논의를 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능이 처음 시행될 때 명칭은 ‘학력고사’였는데 실제로 학력이 무엇인지를 따지기가 굉장히 복잡하다. 우리가 시험을 통해서 잴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며 그마저도 측정오차가 발생한다”면서 “1~2점을 가지고 당락이 갈리고 모두가 이 점수에 매달리는 현행 수능이 적합한 방식인지, 존속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