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협박’ 없는 강간·강간미수 피해가 그렇지 않은 사례보다 더 많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현행법은 강간죄의 성립 요건을 ‘폭행·협박’의 존재로 정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 결과가 ‘비동의 강간죄’ 도입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여성가족부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이 같은 내용의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를 21일 발표했다. 이 조사는 3년마다 시행하는 법정 실태조사로, 이번에는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만 19~64세 성인 1만2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성폭력 유형별 피해율은 ‘PC, 휴대전화 등 통신매체를 이용한 피해’(9.8%), ‘성기 노출’(9.3%), ‘성추행’(3.9%), ‘불법 촬영’(0.3%), ‘촬영물이나 허위영상물 등의 유포’(0.3%) ‘강간·강간미수’(0.2%)로 나타났다. 여성 응답자의 ‘강간·강간미수’ 피해율은 0.4%로 남성보다 높았다.
강간·강간미수 피해 당시 ‘폭행·협박’이 동반되지 않는 사례가 더 많았다. 강간·강간미수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에게 피해 당시 상황(복수 응답)을 물었더니 ‘가해자의 강요’(41.1%)와 ‘가해자의 속임’(34.3%)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가해자의 협박’은 30.1%, ‘가해자의 폭행’은 23.0% 등이었다.
피해 당시나 이후 대응은 ‘소리치며 도움을 요청했다’(51.1%) ‘하지 말라고 말하거나, 분위기나 상황을 바꿔보려고 시도했다’(47.3%) ‘자리를 벗어났다’(44.9%) 순이었다.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응답도 41.3%로 나타났다.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한 번이라도 신고했다’는 여성 피해자 비율은 3.2%에 그쳤다.
여성 성범죄 피해자는 2차 가해에도 시달렸다. 여성 강간·강간미수 피해자가 피해 이후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피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 말해봐야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11.7%)였다.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8.2%), “네가 그런 행동을 할 여지를 줬다”(7.8%) 등이 뒤를 이었다.
경찰에 신고한 여성 피해자 21.1%는 경찰 수사단계에서도 불편하거나 불쾌한 상황을 겪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75.3%) ‘불쾌함·수치심을 느꼈다’(45.5%) ‘나의 피해를 사소하게 생각한다고 느꼈다’(36.6%) 등이 많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성인지예산네트워크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3월11일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기자회견 :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은 두려워하라. 여성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이준헌 기자
‘폭행·협박’이 없는 성추행 사례도 많았다. 성추행 피해 경험이 있는 여성 응답자에게 당시 상황을 물으니 ‘가해자의 속임’(34.9%)이 가장 많았다. ‘폭행·협박 등 없이 갑작스럽게 당함’이 26.6%, ‘가해자의 강요’가 18.7%, ‘가해자의 지위(권한·위력) 이용’이 16.2%, ‘가해자의 회유’가 13.4% 순이었다. ‘협박’은 7.1%, ‘폭행’은 2.7%에 불과했다.
현 정부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부정적이다. 여가부는 지난 1월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에서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협박 유무’가 아니라 ‘동의 여부’로 판단하는 법 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가 법무부 반대로 9시간 만에 “개정 계획이 없다”고 정정했다.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당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기본계획을 철회한 게 아니라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에 대해 검토하겠다는 것”이라며 “국회에서 논의해서 (법을)통과시켜주신다면 여가부는 수용할 생각이 있다”고 했다.
이번 연구조사로 ‘비동의 강간죄’ 도입 주장에 새로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조사를 진행한 연구진은 “성추행 피해의 경우 폭행·협박이 사용되는 경우보다 폭행·협박이 없는 기습 추행이나 강요와 지위 이용 등의 상황에 더 많이 발생하고 있고, 강간 역시 폭행·협박이 아닌 상황에서도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성폭력범죄로 포괄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