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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미래가 있는 미래다

서울 혜화동은 나에게 각별한 장소다. 오래전 나는 이 계단을 올라가 붉은 벽돌 건물 2층의 밀다원이라는 카페를 찾아갔다. 공간의 외부와 내부가 흐르듯 연결된 이 건물은 1979년에 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곳으로 당시 정채봉 선생님이 주간으로 있던 ‘샘터’ 사옥이었다. 나는 동화 쓰는 일에 흥분과 걱정을 동시에 품고 있던 신인작가였다. 당시 밀다원은 나와 비슷한 설렘을 지닌 사람들 몇몇이 모여 책과 동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건물 아래층엔 샘터파랑새극장이 있어서 어린이극이 공연되곤 했다. 줄지어 계단을 내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계단을 타고 오는 곳이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지난주에는 두 번이나 혜화역에 왔다. 한 번은 옛 샘터사옥 바로 뒷집의 어린이작업실 ‘모야’에서 백희나 작가를 만났다. ‘책, 풀, 톱’이라는 이름의 콘퍼런스에 함께 참여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 도서관이란 무엇인지, 만들기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의하는 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형놀이의 대가 백희나 작가가 떠올랐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단독전시를 앞두고 밤낮을 작업실에서 지내던 그였지만 주제를 듣더니 흔쾌히 만나자고 했다. ‘책 나와라 뚝딱, 이야기 나와라 뚝딱’이란 소제목도 뚝딱 만들어졌다.

콘퍼런스에서 그는 자신이 학교를 좋아하게 된 최초의 순간으로 “내 몸에 꼭 맞는 책상과 걸상에 앉았을 때”를 꼽았다. 여기서 나만의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 수 있겠구나 실감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톱과 망치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소규모 우주를 창조하는 대작가가 되었으나 아직도 가장 자주 쓰는 도구는 연필이다. 연필과 종이, 책은 이야기가 선택한 자신의 몇몇 거주지 가운데 가장 유서 깊은 장소다. 책은 정확히 말하면 만드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입체이다. 누구나 만질 수 있는 물건이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은 우리가 입체 안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함으로써 납작해지려는 마음에 풍성한 생기와 동력을 불어넣는다. 그는 어린이에게 더 구체적인 입체의 세계로 나아가라고 권한다. 그럼 거기 너를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얼마 전 이탈리아 최고의 아동문학상인 ‘수페르 프레미오 안데르센’을 수상한 그의 그림책 <알사탕>은 바로 그 입체적 우정의 생성 서사다.

이틀 뒤에는 비행기를 타고 멀리서부터 날아온 그림책 작가 존 클라센을 만나기 위해 혜화역에서 내렸다. 수십년 전 웅크리고 앉아 연극을 보던 샘터파랑새극장에서 그의 신작 북토크가 열렸는데 지하 소극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의 냄새와 습기가 변하지 않았음을 느꼈다. 알다시피 유령은 적어도 수백년은 사는 법이니까, 이 작은 극장 안에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를 먹고살아온 이야기의 유령들이 모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낮은 무대에 존 클라센과 나란히 앉아 책과 친구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곳에 깃들었던 책의 유령들을 소개했고 존 클라센은 즐거워하면서 그곳에서 어린 소녀와 유령이 나오는 자신의 새 그림책 <오틸라와 해골>을 직접 읽어주었다. 친구인 작가 맥 바넷과 오랜 기간 탁월한 공동 작업을 이어가는 그에게 우정의 비결을 묻자 “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귀라”고 말했다. 친구를 사귀고 싶은 어린이라면 책이 있는 곳에 우선 발을 디딜 일이다.

나에게 혜화역 벽돌 건물은 책의 생가다. 거기서 책을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깊이 좌절하고 삶의 어느 대목에서는 기어 올라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찔한 계곡의 횡단을 앞둔 우리 어린이들에게 튼튼한 책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일이 어른이 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여라고 생각했다.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지만 어린이와 책의 만남을 공격하는 사람은 나의 적으로 삼기로 했다. 책을 없애는 것이 미래를 맞이하는 방식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읽는 미래만이 있는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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