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혁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윤석열 대통령. 경향신문 자료사진
법원이 지난 23일 한상혁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면직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하며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에 따른 필요성’은 인정된다면서도 “면직처분 효력이 정지될 경우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법원이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2020년 TV조선 재승인 심사 과정에서 한 전 위원장이 사실상 위법성을 알고도 묵인하는 등 잘못이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재판장 강동혁)는 “일부 비위행위에 관한 처분사유 부분이 일응 소명되어 실체적 정당성을 갖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법원의 이번 결정에 대해 법조계 일각에서는 사실상 본안 재판에서 다툴 내용까지 앞서 판단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면직처분 효력을 멈춰야 한다는 이유 중 하나로 ‘검찰총장 윤석열’의 직무집행 정지 사례를 들던 한 전 위원장 측은 법원이 모순된 논리를 폈다고 반발했다.
추가 심리 필요한데, 위원장 의무 어겼다?…한상혁 측이 낸 증거 ‘악수’ 됐나
25일 법원의 결정문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본안청구가 이유 없음이 명백한지 여부’에 대해 27쪽 중 13쪽을 할애해 판단했다. 통상 집행정지 사건에서 행정처분 효력을 정지할 필요가 있는지를 주된 판단 대상으로 삼고, 행정처분 자체의 적법 여부는 따지지 않는 점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본안 소송에서도 처분 취소 가능성이 없음에도 집행의 정지를 인정하는 것은 제도 취지에 반하므로 ‘신청인의 본안 청구가 이유 없음이 명백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집행정지 요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TV조선 재승인 심사 과정에서 점수조작 인식·은폐 지시’(제2 비위행위)와 ‘허위 보도자료 배포’(제4 비위행위) 등 2가지 처분 사유에 대해서는 “방통위 소속 공무원에 대한 지휘·감독 소홀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 공정의 의무 위반 등은 일응 소명됐다고 보인다”고 했다. 한 전 위원장에게 적용된 4가지 처분 사유 모두에 대해 “본안 재판에서 충분한 심리가 필요하다”면서도 사실상 TV조선 재심사 과정에서 한 전 위원장의 잘못이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한 셈이다.

종합편성채널 재승인 심사점수 조작 혐의로 기소된 한상혁 전 방송통신위원장. 연합뉴스
한 전 위원장 측은 “재판부는 (2020년 TV조선 재승인 과정에서) 평가 점수 수정과 관련한 처분 사유가 사실과 다르다는 한 전 위원장의 주장이 이유 있고 본안에서 충분한 심리가 필요하다고 판시하면서도, 이 처분 사유를 이유로 신청인이 소속 공무원에 대한 지휘·감독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판단한 것은 논리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결정문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한 전 위원장 측이 제출한 기록이 재판부의 판단 근거 중 하나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한 전 위원장 측이 관련 형사사건 기록에서 선별해 제출한 방통위 관련자의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한 전 위원장에게 전화해 TV조선이 재승인 요건을 충족했다는 평가점수 집계 결과를 보고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내용이 확인된다는 점을 들어 “한 전 위원장이 위법·부당한 상황을 알면서도 (점수 조작을) 묵인하고 사실상 승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한 전 위원장이 처음 이런 보고를 받았다면 나중에 과락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TV조선 평가점수가 사후 수정됐다는 점을 인지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형사 범죄 성립 여부와 별개로 ‘한 전 위원장이 방통위원장으로서 의무를 방기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결정문에 구체적 판단 사유가 적힘으로써 앞으로 있을 한 전 위원장의 형사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유사한 ‘검찰총장 윤석열’ 사례, 법원의 논리는 달랐다
2020년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직무집행 정지 처분을 멈춰달라며 낸 집행정지 사건을 한 전 위원장 사건과 비교해보면, 법원은 집행정지 요건서부터 다른 판단을 내렸다. 당시 법원은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징계 사유 존재 여부에 대해 매우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 집중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조미연)는 우선 “본안은 본안 청구가 이유 없음이 명백하지 않아야 한다는 정도의 소극적 요건으로만 심리될 뿐”이라며 “집행정지 사건의 심리 및 판단에 있어 본안에서 다뤄져야 할 처분의 위법성까지 구체적·개별적으로 판단함은 적절하지 않다”고 전제했다.
특히 검찰총장의 직무가 정지되면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 한 전 위원장 사건과 결론이 갈렸다. 당시 재판부는 “검찰총장의 직무집행 정지가 지속될 경우 검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검찰총장의 임기를 2년 단임으로 정한 검찰청법 등 관련 법령의 취지를 몰각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검찰총장의 직무집행 정지가 이뤄질 경우 검찰사무 전체의 운영과 검찰공무원의 업무 수행에 지장과 혼란이 발생할 우려 역시 존재하고 이 또한 중요한 공공복리”라며 “(징계사유 존부에 관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총장에게 방어권이 부여되는 등 절차를 거쳐 충분히 심리된 뒤 이뤄지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고 했다.

법원/ 김영민 기자
법조계 일각에선 이러한 법원의 논리가 윤 대통령과 달리 한 전 위원장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방통위원장 역시 방통위법상 임기가 3년으로 정해져 있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해 임명되는 등 엄격한 신분보장을 받는 행정기관장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법원이 이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은 채 “한 전 위원장이 직무를 수행한다면 방통위 심의·의결 과정과 결과에 대한 사회적 신뢰 등이 저해될 구체적 위험이 발생할 것”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나아가 법원이 한 전 위원장 사태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 등 맥락에 대한 판단 자체를 배제한 채 결론 내렸다는 평가도 있다. 한 전 위원장 측은 “정권이 변경된다고 해서 임기가 보장돼있는 위원장의 지위를 박탈할 경우 언론의 자유·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탄핵에 의해서만 방통위원장을 면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법리적 해석만 내놓았다. 이 부분에서 언론의 자유 등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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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전 위원장은 임기를 두 달 남긴 상태에서 면직 처분이 나온데다, 형사재판에 넘겨졌다는 점에서 윤 전 총장 사건과는 달리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전 위원장은 집행정지 신청이 기각된 당일 항고하겠다고 했다. 다만 남은 임기가 한 달가량에 불과해 한 전 위원장이 실제 업무에 복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한 전 위원장의 형사재판은 26일 첫 공판이 열린다. 이르면 수일 내로 차기 방통위원장에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별보좌관이 지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