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쟁과 장기 평화 반복…고대부터 ‘지정학적 기회’

박명림 연세대 교수

② 역사 : 절대경계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b>광개토대왕비</b>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기록돼 있는 ‘광개토대왕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기록돼 있는 ‘광개토대왕비’.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가장 큰 거시역사적 특징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권적인 정치체로서 초장기 독립적 생존이었다

전쟁은 인간공동체에 가장 크고 깊은 자국을 남긴다. 한국전쟁은 근대 이후 한반도에 도래한 가장 참혹하고 거대한 사건이었다. 피해와 영향의 규모와 크기의 측면에서 근대 이후 한국전쟁에 필적할 만한 사태를 찾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는 한·조(남북) 분단과 정전체제와 한·미 동맹을 포함해 한반도를 둘러싼 기축 질서의 윤곽과 외선이 아직도 한국전쟁이 남긴 출발점으로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또한, 후술하듯 세계 냉전구조의 동아시아로의 확산과, 오늘의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양대 강국인 미·중의 관계 역시 한국전쟁을 계기로 고착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전쟁이 남긴 충격과 파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를 고대국가로까지 펼쳐보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진다. 한국전쟁의 규모와 특성은 예외나 돌출이 아니었다. 한반도와 주위에 도래한 주요 전쟁들의 규모와 영향의 크기는 거의 당대 세계 최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의 층위와 길이 또한 한국전쟁처럼 아주 넓고 길었다. 고구려·수, 고구려·당 전쟁을 포함해 고대시대부터 전쟁의 규모와 크기 그리고 결과와 귀결이 당대 동아시아 질서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고구려 멸망의 영향을 보라.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도래했던 대규모 전쟁들의 궤적과 항로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절대경계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갖는 독특한 특성의 반영이었다. 이곳 한반도에서는, 특히 한·중·일 간에는 매우 드문 전쟁 빈도에도 불구하고 일단 충돌했다 하면 거대 전쟁이라는 특성을 보여왔다. 이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더라도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한·중·일, 소원한 대신 충돌 적어

국가들로 구성되는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가장 큰 거시역사적 특징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권적 정치체로서 초장기 독립적 생존이었다. 개별 왕조의 존속 기간도 한국은 중국과 일본을 포함해도 세계 최장에 속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점은, 왕조 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된 주권적 독자 정치체의 초장기 생존이었다. 7세기에 이르면 한국은 벌써 지리적 범위, 정치적 주권, 종족, 언어, 문화에 있어 지금까지 이어지며 발전해온 독립적인 정치체가 등장하였다. 중간에 몽골과 일본에 의한 간섭지배와 강제점령을 포함하더라도 한국은 현존 세계 모든 제국 및 주권국가들 중 통일된 독자적 정치체로서 중국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라이다.

이는 한국인 연구자인 나의 주장이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20세기 세계 최고 권위자들(페어뱅크·라이샤워)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더 객관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중국 및 일본과의 지리적 격절, 중화제국과 한국 사이에 요동·만주·동북이라는 완충지대 및 세력의 존재, 그로 인한 다원적·복합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국의 운신 공간, 그리고 역내 국제관계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혜로운 판독과 대처가 결합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예외적인 초장기 주권체의 지속은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만약 영토·주권·국민의 상호 인정을 국가주권과 근대 국제질서의 요체라고 한다면,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한국·중국·일본이 상호 간의 주권체를 인정한 사실상의 주권국가, 또는 준(準)주권국가에 기반한 반(半)주권질서, 또는 준(準)근대질서라고 할 수 있었다.

세계사를 보면 인근 국가들끼리는 본래 적대 감정이 매우 높고 무력 충돌이 잦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문 분야별로 탁월한 분석과 연구들이 많다. 그런데 한·중·일은 상대적으로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대신 충돌도 적었다. 일정한 소원(疎遠)과 긴장, 이격(離隔)과 공존이 병존했던 것이다. 특히 한반도는 상세한 전쟁 통계를 볼 때 내전은 물론 전쟁, 즉 대외전쟁과 국제전쟁도 매우 적었다. 그것은 유럽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인근 국가들인 중국 및 일본과 비교하더라도 분명했다. 전통 한반도는 평균 세 세대에 한 번 전쟁을 치를 정도로 장기 평화를 향유하였다. 내전이건 대외전쟁이건 전쟁은 독자적 정치체 단위로 진행되고 파악된다는 점에서 면적의 넓고 좁음을 갖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즉 통일 이후 전통 중화제국의 역사에 대해, 면적이 넓기 때문에 전쟁이 많았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전통시대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 인사들은 ‘전쟁 희귀’와 ‘장기 평화’라는 한국 역사의 독특한 조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유성룡·이순신·선조·김육(金堉)·박규수·이승만·신채호 등 최고의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태평성대 100년’ ‘200년 태평’ ‘태평세월 200년’ ‘태평 200년’ ‘태평세월 300년’ ‘치제(治躋)태평’ 등의 표현을 써서 이를 정확하게 드러내었다. 이들 이외에도 당시 많은 기록들이 같은 견해를 피력한다. 물론 이들의 통찰이 긍정적 의미만 띤 것은 아니었다. 태평성대에 철저한 대비를 하지 못하여 가공할 전란을 초래하였다는 엄정한 반성이 포함된다.

그들의 통찰대로 한국은 긴 시차를 갖는 세 번의 전란시대를 갖는다. 제1차 전란시대는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삼국통일전쟁, 백촌강 전투 등이 집중된 7세기였다. 제2차 전란시대는 동아시아 7년 전쟁, 조·청 전쟁(병자호란·정묘호란)을 포함한다. 1차와 2차 전란시대 사이에는 거란과 몽골의 침략이 존재했다. 제3차 전란시대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주권회복전쟁(1905~1945년), 한국전쟁 시기를 말한다. 이들 시기를 제외하면 한국은 수세대에 걸쳐 전쟁 부재와 장기 평화를 향유하였다.

<b>임진왜란</b>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제승당(원래 이름 ‘운주당’)에 걸린 <한산대첩도>. 경향신문 자료사진

임진왜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제승당(원래 이름 ‘운주당’)에 걸린 <한산대첩도>. 경향신문 자료사진

<b>러일전쟁</b>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조선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하는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러일전쟁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조선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하는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절대경계’로서 한반도는 상향을 통해 두 문화와 문명과 이념들의 접점과 융합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곳을 무력으로 침략한 국가와 지도자는 거의 멸망하거나 죽는다는 기묘한 ‘절대 특징’을 보여주었다

세계 변동 충격파를 최전선서 감당

전쟁도 평화도 한국은 세계 질서의 변동에 긴밀히 조응하였다. 세계 변동이 일거에 몰려들면서 이곳 사람들은 중심의 충격파를 최전선 촉수로서 온몸으로 감당하였다. 동아시아 7년 전쟁(1592~1598년)을 보자. 그 전쟁은 세계의 구조변동과 격변, 문명의 발전과 조우가 이곳으로 모두 압축된 듯한 양상을 보여준다.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은 세계 대항해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침략은 1492년 ‘콜럼버스의 조우’ 이후 정확하게 100년 만이었다. 유럽에서 본격적인 대항해의 한 요인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인한 충격이었다. 동(東)의 공격으로 인해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 서구문명이 안과 밖에서 변혁을 시도한 것이 종교개혁·르네상스와 본격적 대항해였던 것이다.

중요한 점은 100년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그 100년 사이의 지각변동이 동아시아 7년 전쟁의 도래에 끼친 파급효과였다. 콜럼버스의 조우 이후 16세기 들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인도와 중국에 진출하였고, 이어서 일본과 필리핀에 도달하였다. 콜럼버스의 조우 이래 서양이 일본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반세기였다. 그 후 다시 반세기 만에 동아시아 7년 전쟁이 도래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상선, 가톨릭, 조총(화승총), 각종 작물과 물품들이 전파되었다. 일본의 경제와 무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16세기 유럽은 밖으로는 대항해로, 안으로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격변을 거듭하였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합병과 엘리자베스 시대의 개막 및 인도 진출,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의 최초 등장 및 동진정책과 시베리아 진출도 이 시기였다. 유럽 내 갈등도 극심하였다. 서구의 대항해와 대륙 조우와 동양 진출에 발맞추어 서구문명을 먼저 맞이한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발판 삼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패권을 역전시키려 한 전쟁이 바로 동아시아 7년 전쟁이었다. 한반도를 매개로 한 ‘정명’(征明)과 ‘입명’(入明)이라는 침략 명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대항해 시대에 이은 동서조우 시대에 동양과 서양, 대륙과 해양이 이중으로 충돌한 세계전쟁 시대의 한 출발점 역시 한반도 문제였다. 러일전쟁을 말한다. 동양과 서양이 대륙과 해양에서 동시에 세계전쟁 시대에 돌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전쟁 시대는 절정의 사태인 한국전쟁 정전과 함께 종료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들은 거의 모두 지역적·지방적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를 다시 일정 정도 두 진영으로 나누며 준(準), 또는 준준(準準) 세계전쟁의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세계전쟁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못 미친다.

다른 한 특이점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절대경계’로서 한반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른바 상향(相響)을 통해 두 문화와 문명과 이념들의 접점과 융합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이곳을 무력으로 침략한 국가와 지도자는 거의 항상 멸망하거나 죽는다는 기묘한 ‘절대 특징’을 보여주었다. 수양제는 연속하여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끝내 왕조도 멸망했고 본인도 목숨을 잃었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유명한, 중국인들이 성군으로 추앙하는 당 태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양제가 반드시 고구려를 탈취하려는 생각으로” “사망에 이르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그런데 어찌 군대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있겠는가?”(<정관정요>)라고 스스로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 모두 실패하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전쟁은 한반도를 무대로 하거나 한반도 요인을 둘러싼 대결이었다
거의 모든 전쟁이 한국 문제이자 동아시아 문제이고 국제 문제였다

한국 없는 동아시아 전쟁은 없어

동아시아 7년 전쟁을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 사망과 함께 그의 시대도 역사적 조종을 고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일본은 에도막부(江戶幕府) 시대라는 다른 시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청일전쟁 이전까지 다시는 한반도와 대륙을 향한 침략전쟁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는 일본에 해양국가로 나아가게 만든 국가 정체성과 전략의 대전환을 초래하였다. 이순신과 한국이 정초한 동아시아 평화체제였다. 동아시아 7년 전쟁 참전 이후 명나라 역시 멸망하였다. 침략을 당한 조선의 국가와 왕조는 이후 300년 이상이나 더 살아남았으나, 침략과 지원을 결행한 일본과 명은 모두 지배체제와 왕조가 붕괴되는 대역설이었다.

그 전쟁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나라 역시 한반도에서의 청일전쟁을 계기로 급속한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 문제를 계기로 발발한 이 전쟁은 전통 중화제국이 신흥 일본에 패퇴한 첫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 역내 패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넘어갔다. 사상 최초였다. 중화질서와 조공체제 역시 확실한 조종을 고하였다.

한국전쟁의 시작을 함께 주도한 스탈린 역시 전쟁의 종결을 보지 못한 채, 즉 최초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쟁 중 사망하였다. 한국전쟁은 스탈린으로서는 실패한 전쟁인 동시에 마지막 전쟁이었다(다른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소련으로서는 크게 성공한 전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공교롭게도 수양제에서 도요토미를 거쳐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국가나 지도자들에게 한국 침략은 그들의 마지막 전쟁이었다.

한국을 침략한 국가와 지도자들이 겪은 멸망과 패퇴의 반복 역사는 절대경계지대가 갖는 길목과 요충, 수렁과 가교라는 이중역할의 가장 깊은 역설이었다. 그러한 이중위치의 길항은 결국 역내 균형과 질서 유지의 최전방 초소 역할로 수렴되었다. 역내 국제질서 격돌의 소용돌이에서 그것을 넘고 나면 장기 안정과 평화를 구가하였던 것이다. 장기 생존과 평화, 그리고 세계적 규모의 전쟁의 도래라는 극히 상반되는 모순적 역사는 모두 대륙과 해양,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전방초소 위치로부터 주어진 산물이었다.

이는 한국인들이 이를 알았든 몰랐든 관계없는 객관적 조건의 문제였으나, 한국인들은 전통시대에 자주 강조한, 북로남왜(北虜南倭)와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는 예리한 현실주의적 인식과 표현에서 보듯,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 배(앞)와 등(뒤) 모두에 적을 안고 있다는 경계의 인식을 말한다. 동아시아 7년 전쟁을 포함해 한국은 항상 역내 질서의 균형자이자 회복자였다. 한국의 존재와 생존 자체가 역내 균형과 안정, 질서와 평화의 한 준거였다. 이때 준거는 양극이나 극점이 아닌 일종의 기준점이나 수렴지점을 말한다.

따라서, 한국 문제는 언제나 동아시아 지역 문제이자 국제 문제였다. 한국의 존재와 상황으로부터 발원하는 지역과 세계 차원의 갈등과 평화 문제를 말한다. 그 한국 문제는 절대경계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숙명과 기회, 조건과 가능성, 피해와 번성이라는 상반되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충돌과 선도 지대가 거의 모두 경계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요컨대 한반도에서의 전란은 동아시아 지역전쟁의 도래, 또는 동아시아 전란시대를 의미했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관여되지 않은 역내 국제전쟁은 거의 부재하였다.

삼국시대 백촌강 전투 시의 백제·왜 연합 대 나당 연합의 한반도 내 최초의 한·중·일 3국 간 동아시아 국제전쟁을 시작으로 고려시대 몽골의 일본 침략, 조선시대 조선·일본·명 사이의 동아시아 3국 전쟁, 근대 이행기의 청일전쟁, 현대의 자유진영 대 공산진영의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국제전쟁은 거의 모두 한반도를 무대로 하거나 한반도 요인을 둘러싼 대결이었다. 이들은 한국 문제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문제이고 국제 문제였다. 즉 한반도 평화 없이 동아시아 평화는 요원했고, 동아시아 평화 없이 한반도 평화는 불가능했다. 한국인들은 이 점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필자 박명림 교수

[정전 70년 한반도 영구 평화를 향해] 대전쟁과 장기 평화 반복…고대부터 ‘지정학적 기회’

연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 4·3(석사)에 이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박사)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래 평화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현상 연구에 천착해왔다. 정치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 전쟁과 평화, 생명과 인간, 그리고 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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