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 있는 생명권을 깨우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27일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심판 마지막 변론기일이다. 나는 파면 결정만큼 기대하는 것이 또 있다. 헌법재판소가 생명권을 살려내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안전을 권리로 인식하게 됐다. 국가라면 생명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감각. 촛불 이후 국회 개헌특위와 대통령 개헌안 모두가 생명권을 명시한 배경이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없던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0조를 통해 생명권이 기본권임을 밝혀왔다. 권리가 추상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움직이게 하는 일이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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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 살아나던 생명권을 다시 잠재운 것이 헌법재판소였다. 박근혜 탄핵심판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생명·신체의 안전에 관한 권리가 기본권”이며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하고 직책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한다는 점까지는 분명히 짚었다. 그런데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 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고, “대응조치에 미흡하고 부적절한 면이 있었다고 하여 곧바로 피청구인이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며 책임을 면해주었다.

해난사고가 발생했다고 대통령이 현장으로 달려가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특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행위 의무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다. 뭐든 했다는 사실만으로 행위 의무가 이행되는 것도 아니다. 재난의 속성상 기관이나 개인이 취한 조치들이 완벽하긴 어렵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이 생명권 보호 의무의 본질을 훼손했는지 판단해야 했다. 그러나 ‘직접 구조활동’을 예시하거나 부족할 수도 있다는 말로 심사를 회피했다. 헌법재판소는 생명권을 흔들어 깨우는 대신 조용히 물러났다. 파면 결정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한 동안 생명권은 다시 긴 잠에 들었다.

행안부 장관이 이태원으로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참사 발생 소식을 듣고 운전기사를 기다리고만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제가 그사이에 놀고 있었겠습니까?” 놀고 있어선 안 된다는 건 출발선일 뿐이다. “저 나름대로는 여기저기 전화하면서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제 나름의 판단을 한다. 직책에 부여된 권한을 사용해 합당한 조치를 취할 때 직책이 수행되는 것이다. 생명권 보호 의무 심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판단했는지, 어떤 우선순위를 고려했는지, 효과적인 수단을 채택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생명이 박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국가가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유럽인권재판소는 구체적 심사를 강조한다. 공권력의 집행에서, 산업활동에서, 보건의료 체계에서, 공공장소에서 각각의 특성을 고려한다. 위험이 있다는 걸 알았는지만 묻지 않고 알았어야 했는지 심사한다. 어떤 위험은 몰랐던 것부터 의무 위반의 요소가 된다. 여러 조치들이 적절했는지 충분했는지도 분석한다. 판단 착오나 부주의가 있을 수 있지만 시스템의 효과적인 기능을 해쳐서는 안 된다. 사건 발생 후 효과적인 조사를 수행할 절차적 의무가 이행됐는지도 심사한다. 생명권이 추상적 권리에 그치지 않게 깨우는 노력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면 법이 보호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은 잠자고 있지 않다. 권리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재난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불쑥 찾아와 우리를 또 깨울 것이다. 그때마다 권리를 보호할 줄 모르는 국가를 직면해야 하는가. 헌법상 기본권이 허공을 떠도는 말뿐이라는 걸 확인해야 하는가. 헌법재판소가 재난보다 먼저 권리를 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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